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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콘스탄티누스 전환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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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함으로써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대규모의 세계사적인 사건이었고, 로마 국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시우스 클로루스와 헬레나의 아들로 285년경 세르비아의 나이수스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니코메디아의 디오클레시아누스 황제의 궁전에서 보냈다.

디오클레시아누스가 305년 5월 1일 집합한 군대 앞에서 그의 퇴위를 공포했을 때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연단 옆에 서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만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군인들도 황제가 그를 황위 계승자로,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제1정제正帝로 임명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완전히 무시하였고,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승격시키고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를 제2정제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로 막시미누스 다자와 세베루스를 황위계승자로 임명하였다.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아버지가 통치하던 갈리아로 갔다.

이듬해 그의 아버지가 죽자 이 지역의 군대들은 306년 7월 25일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언하였다.

312년 봄, 제1正帝  갈릴레우스가 죽자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 황제 막시미우스를쫒아내고

로마를 정복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전진하였다.

 

Tip: 디아클레시아누스 황제 때 로마제국의 행정구획을 개편했는데,

그는 제국을 1백개의 주州로, 그것을 다시 12개의 부府로 나누었다.

그리고 군주정체君主政體를 사분령주四分領主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통치권의 분활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통일성은 디오클레시아누스가

최고의 권위를 요구함으로써 유지되었다.

 

그는 로마 부근 밀비 다리에서 군사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을 만났다.

위급하고, 전투의 결말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인들의 하느님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이것으로 승리하여라'는 문구가 쓰여진 십자가를 하늘에서 발견한 그의 꿈은 더욱 이러한 그의 마음을 굳게 하였다.

그가 312년 10월 28일 막센시우스의 군대에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것을 그는 그리스도의 힘과 그리스도교가 더욱 강하다는 증명으로 생각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이래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신봉하고 있음을 고백하였고,

비록 이교적인 국가예식과 기타 종교 예식을 계속 요인하였을지라도 온갖 방법으로 그리스도교를 촉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그리스도교 관용령)'을 작성하여 포고의 형식으로 동방 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부터 그리스도교를 공공연하게 장려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성직자들에게 이교의 제관들과 같이 과세를 면제하여 주었고,

십자가형을 폐지시켰고, 범죄자 처벌 수단으로서의 검객의  시합을 금지시켰고,  

유언장을 수리할 권한을 교회에 부여하였으며, 주일예배를 국법으로 지정하였다. 

 

또한 화려한 교회건축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황제의  신앙고백을 드러냈으니,

313년 교황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선사하고, 라테라노 대성전의 건축을 계획하게 했다.

또한 그는 320년경 비아 고르넬리아 거리, 이교인의 큰 묘지 복판, 바티칸 언덕에 있는

베드로 무덤 위에 베드로 대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이어 예루살렘의 성묘 위에 대성전 기초공사를 하였고, 또한 베들레헴의 성탄교회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를 통하여),

트리어의 황제궁전 2층 교회 등등 여러 교회의 기초공사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그리스도교 주교들을 그의 축근에 끌어 들였다.

그는 제국의 주교들에게 사법상의 권한을 위임하였고, 입법을 통하여 교회를 국가에 편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동로마 황제 리치니우스를 정복한 후(324),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세로 정복한 동부 제국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도록 지시하였다.

그는 제국의 통일을 위한 이 마지막 전쟁을,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리치니우스에 대한 종교전쟁으로 간주했었다.

보편적인 그리스도교는 보편적인 제국의 기반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바야흐로 심각한 분열의 위협을 받고 있던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

에집트의 멜리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 교회의 일치를 재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는 325년 불화를 제거하기 위해 최초의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그는 '외적 영역의 주교'로서, 교회에 대해 전적 연대 책임을 느꼈다.

그는 이교예식의 대사제로서 정신적이로 영적인 지도역을 맡고 있는 것과 같이

그러한 역할을 그리스도교회 안에서도 요구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교회의 점유에 관여하였고

교회회의의 활동을 규정하였다.

 

한편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극히 이교적인 특징이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이 세운 소도시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에 새로운 로마의 수도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그가 단독황제가 된 324년 11월에 착공하여 6년 후인 330년 5월에 완공하였다.   

이도시를  콘슨탄티노플로 명명하였고, 이 도시는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그는 337년 성령강림축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직전 니코메디아의 아리우스파 주교 에우세비오가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황제의 화려한 옷을 몸에 걸치지 않고, 흰 세례복을 입고 숨을 거두었다.

동방에서 그는 성인으로 '준사도'로, 13번째의 사도로 공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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