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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전환기의 문제성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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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문제성 


교회는 이제 황제의 특별한 보호로 그의 사명을 더욱 용이하게 달성할 수 있었다.

바로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국가로부터 최후의 가장 잔인한 박해로 그 존재마저 위협되었던

그리스도교, 숫자로 보아도 여전히 소수에 불과했던 그리스도교가, 국가와의 새로운 동맹으로 돌연

그의 신앙을 공공연하게 설교하고, 그의 종교예식을 발전시키고, 그의 생활원칙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교회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돌보려면 완전히 새로운 조직과 사목방법이 필요하였다.

세례지원기의 대내외적 정비, 설교와 교리교수에 대한 새로운 장려, 전례의 발전 및

아직 존속되는 이교와의 대결 등은 그리스도교 신학에 귀중한 자극을 주었다.

 

종교문제는 콘스탄티누스의 시대에 있어서 " 당시의 가장 자극적인 문제"였고,

그 후에도 오래동안 그러하였다. 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근본적인 인정은 격렬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그리스도교회로부터 환영되었으나 이에 못지않게 이교의 중심지인 로마와 아테네에서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만약 이와같이 종교적으로 흥분되어 있는 시기에 주교들이 국가의 도움을 즐겨 이용하였다면

누가 그것을 나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교회의 법문들이 이제 더욱 강조되고 또한 국가의 승인을 얻고 또한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세속 권력'의 지원을 얻게 되었다면

주교들에게는 고마울 따름이었을 것이다. 공의회의 결정이 곧

국법으로 공포되었고, 그래서 정치생활에 편입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노선을 계속하였다.

콘스탄시우스(337~361)는 이미 341년에 미신과 이교적 제헌을 공격하였고,

346년에는 그의 동생 콘스탄스(337~350)과 같이 이교 성전을 완전히 폐쇄할 것을 명하였다.

물론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 황제 시대에 강경한 반격이 일어났다.

그는 그리스도교와 절교하고 이교를 부활시켰다.

러나 그의 후계자 요비아누스(379~394)는 제국에서의 특권적인 위치를 교회에 다시 돌려주었다.

제국의 서방에서는 그라시아누스 황제(375~383)가, 동방에서는 테오도시우스 대제大帝(379~394)가

마침내 그리스도교를 유일한 로마 제국의 정당한 종교로 승격시켰다.

392년 황제칙령은 이교적 제헌예식에 참여하는 것을 불경죄로 선언하였다.

그때부터 이교는 공생활에서 급속히 사라졌다. 그리스도교는 국교가 되었고, 교회는 제국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국가와 이렇게 밀접하게 관계힌 것은 옳았던 것일까?

그것은 예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이미 당시의 사람들도 이 질문네 서로 다르게 대답하였다.

어떤 이들은 감사와 기쁨에 넘쳐 그것을 국가의 그리스도교화로 간주하였고

어떤이들은 교회의 속화俗化를 두려워하였다.

 

중세기의 교회개혁 문헌에 보면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원시교회만이 개혁의 전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사도적 단순, 청빈의 이상, 속리俗離가 그 특징이다.

교회는 이러한 특징으로 돌아가야 한다.

피오레의 요아킴(1202)은 이렇게 11,12세기에서 요구하였고, 또한 13, 14세기의

프란치스코회의 엄격주의자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교회에서 쇠퇴밖에는 보지 않았다.

미구에 루터는 이러한 쇠퇴를 오로지 교황직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때부터 소위 '쇠퇴 이론'이 프로테스탄트 역사 서술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이런한 기본 견해는 세목에서 그  판단이 변했다할지라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그래서 계몽시대는 모든 악의 원인을 사제직의 지배욕에서 보았는데,

사제들은 박해가 끝나면서부터 황제의 총애를 누리고, 권세욕에 떨어지고,

복음의 순수성을 그들의 이기적인 관심으로 희생시켰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제국교회는 자진하여 국가 권력에 순응함으로써 본연의 사명을 배반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에대해 부정을 저질렀다.

 

 다만 이러한 잘못된 발전이 19, 20세기에 와서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즉 부패가 벌써 사도시대의 종료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도 있고,

또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호교가들에 의해 그리스도교의 희랍화로 시작되었다는 이도 있고,

또는 콘스탄티누스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이도 있었다.

어쨌든 후기의 가톨릭교회는 잘못 발전하였고, 그리스도의 뜻을 오해하고,

유일한 원시교회의 유효한 이상理想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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