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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교의 논쟁과 동방의 공의회들/ 삼위일체론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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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 논쟁과 동방의 공의회들-1

 

콘스탄티누스가 보편적인 그리스도교회를 그의 보편적인 제국의 기반으로 삼을 것을 결심한 바로 그 시기에,

그는 그가 믿고 있었던 것처럼 교회가 결코 일치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는 심한 내적 분쟁으로 혼란 중에 있었고, 바로 그때 심한 분열상태에 놓여 있었다.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파, 에집트의 멜리시우스 이교, 마침내 아리우스파의 이단들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나아가서 미해결의 문제가 신학문제들도 해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제국을 통일하자마자(324) 제국공의회를 소집하여 일치를 재건하고 어려움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3대 테마가 신학적인 토론의 대상이 되어 이제부터 3세기 동안을 몰두 시켰으니,

그것은 곧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 의화설義化說이었다. 의화설은 주로 서방에서 흥미를 갖게 했다.

 

1. 삼위일체론

 

그리스도 양자설養子說(아돕시오파)

 

 그리스도를 순 인간으로 간주하였는데, 그리스도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와 같이

어느 시기에 가서 일종의 神力으로 충만해져서 하느님이 되었고,

이렇게 하느님으로부터 '양자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원래의 하느님은 오직 성부뿐이고 그리스도는 채용된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빅토리아 교황(189~198)아돕시오파 데오도토스를 파문하였다.

 

그리스도의 출현양식설出現樣式設(모달리스파)

 

유일무이한 하느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한 출현양식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이 설에 따르면 성부가 실제로 우리를 위해 수난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갈리스토 교황(217~222)이 모달리스파를 단죄하고 배척하였다.

 

로고스 ·그리스도론

 

그리스도교 고대의 가장 큰 학자이고 알렉산드리아의 교리신학교를 창설한 오리제네스에 의해 숙고된 것이다.

그는 비록 성서에 따라 로고스·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고수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를 성부에 종속시켰고,

다시 성령을 성자에게 예속시켰다. 비록 성자와 성령에게 동일한神性을 돌렸다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은 파생적이고 열등한 방법에서였다.

그래서 사실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복수(複數)적 일신론의 결과가 되었다.

 

로고스는 그리스어 ‘말하다’에서 나온 말이다.

'로고스'라는 용어로 정의되는 개념은 그리스·인도·이집트·페르시아 등의 철학·신학 체계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 문헌과 교리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신이 우주창조 및 질서유지의 원리이자

신의 인간구원 계획을 계시하는 원리로 묘사하거나 정의하는 데 이 개념을 사용했다.

따라서 이 개념은 예수가 선재(先在)했다는 그리스도교의 기본교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 사상에서 로고스 개념은 적어도 BC 6세기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우주의 진행과정에는 인간의 이성능력과 비슷한 어떤 로고스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색인 : 그리스 종교).

그뒤 키티온의 사상가 제논(BC 4~3세기)의 가르침을 따르는 스토아 학파는 로고스를

모든 실재에 스며 있는 활동적인 이성적·정신적 원리로 규정했다.

그들은 로고스를 섭리, 자연, 신과 우주적 영혼 등으로 불렀으며 이 로고스는

우주의 로고스에 포함되어 있는 많은 종자 '로고이'(logoi)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1세기 유대인 철학자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은 로고스가 신과 우주를 매개하고 창조를 수행하며

인간정신이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뜻을 따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가르쳤다.

필론과 중세 플라톤주의자(BC 4세기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플라톤의 가르침을

종교용어로 해석한 사람들)에 따르면, 로고스는 세계에 내재하며 동시에 초월적인 신적 정신이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요한 1,14). 그리고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요한 1,1). 이상의 성서 구절에서 결국 말씀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뜻하며,

이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아리우스派(260~336)

 

아리우스는 313년부터 알렉산드리아의 바우칼리스 성당에서 사목사제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설교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서신과 성가 그리고 '향연'이라는 저술을 통하여 극단적으로 종속적인

그리스도론을 주장함으로써 318년경 그의 주교인 알렉산드리아의 알렉산델 주교와 충돌하게 이르렀다.

엄격한 금욕가요 유창한 설교가로서 상당한 자기 도취와 환상에서 그는 민중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얻고 있었다.

그는 로고스 자체를 완전히 하느님 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즉 로고스(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神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전혀 다르고 영원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으며, 시간적으로 창조되었고,

불완전하고 고통을 겪을 수 있다. 다만 그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첫째이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 있고,

그래서 그를 반신半神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 본질상 신성을 부여할 수 없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함으로써 아리우스는 교회에서 이탈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회회의는 그의 설을 이단으로 배척하고(318), 그를 교회공동체에서 제거하였다.

아리우스는 안티오키아의 친구들한테로 갔다. 그는 특히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 주교의 도움을 받았다.

교회사가인 체사레아의 에우세비오도 이 서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이 알겍산드리아로 아리우스를 귀환시키는데 성공했을 때 곧 알렉산드리아에서 격렬한 논쟁,

가두시위, 야간집회가 벌어졌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가 간섭하였고, 모든 주교들을

니체아(소아시아의 서북부지방의 소도시)로 소집 교회회의(공의회)를 개최하였다.

 

니체아 공의회(제1차 제국 교회회의/325년 5월 20일~7월 25일까지 개최)

 

이 회의의 참석자 명단에는 220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교

회사가인 에우세비오는 250명 가량으로 말하고 있다.

참석자는 대부분이 동로마 제국에서 참석했고, 서방에서는 단지 5명의 주교가 참석했다.

실베스텔 교황은 고령으로 인하여 참석하지 못하였고, 대표로 2명의 사제를 파견하였다.

회의는 격렬한 오랜 토론 끝에 정통 신앙파가 승리하였다. 이른바 니체아 신경에서 정통교리가 정의되었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께서 나신 천주의 외아들이시며, 천주로부터 나신 천주시요,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오,

참 천주로부터 나신 참 천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다" 

황제 친히 포교를 통해,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참된 신앙의 가장 흉흉한

원수로 파문하고 추방하였음을 전 교회에 알렸다.

또한, 그는 그들의 저서를 불사르도록 지시하였다.

 

다른 문제도 이 공의회에서 심의되었고, 그 결과는 간략한 20개조의 교리규정에 기록되었다.

주교, 신부, 부제들의 독신제에 대하여도 언급되었다. 독신제는 이미 많은 지방에서 보급되어 있었다.

성직자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멍에를 지우지 말도록 경고한, 증거자 빠프누시우스 주교의 간절한 간언을 따라

공의회는 독신법을 반포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공의회는 유효한 결혼의 계속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축첩은 단죄하였다.

 

만일 이 '위대하고 거룩한 교회회의'의 결과가 그대로 지켜졌더라면  사람들은 그것으로써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곧 그의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328년 추방당한 에우세비오 주교를 니코메디아로 돌아오게 했다.

아리우스도 돌아올 수 있었는데,그는 니케아 신경에 형식적으로 동의하고 나서 황제의 명으로 복직되었다.

그러는 동안 니케아 공의회에서 부제로서 아리우스에 반대하고 정통교리를 위해 투쟁했던

아타나시오는 328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되었는데, 아리우스를 그의 성직자로 다시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335년 황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니체아 신경의 용감한 투쟁자였던 아나타시오는 첫번째로 트리어로 추방되었다.

그리하여 아리우스파 황제 발렌스에 의해 다섯번째로 유배되었으나 황제가 죽자 다시금 복직되었다.

그는 죽는 날까지(373) 그의 주교좌 도시에서 정통적 니체아 신앙을 위해 불굴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동안 엄격한 아리우스주의에서 온건한 半아리우스파가 생겼다.

사람들은 '동질'을 '유사'로 해석하려 하였고, 성자는 성부와 '모든 것에 있어서 유사하다'는 성귀成句에 동의하였다.

아리우스파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동질'을 피하려 하였다.

그러다 그라시아누스(375~383)에 의해 동방의 황제로 승진되었던 데오도시우스(379~395)는

아리우스파의 분규를 결정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381년 제2차 공의회를 콘스탄티노플에 소집하였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그간 신학자들은 하느님 안의 '위격'과 '성性'의 개념을 명백히 했었다.

이러한 작업은 아타나시오 주교 외에 특히 3명의 大카파치오 사람, 즉 바실리오(330~379),

나찌안쯔의 그레고리오(329~390), 니싸의 그레고리오(334~394)에게 힘입은 것이었다.

 

그들은 3위의 구별을 다만  신의 내적 관계에서 보았다.

그들에 의하면 다만 하나의 본질이있다. 그러나 그 소지자는 셋이다. 즉 3위 안에서의 하느님이다.

아리우스파로부터 반박된 聖神의 神性도 그들에 의해 밝혀졌다.

성령의 관계는 다른 兩位에서 나온다. 325년 니체아에서 만들어진 신조에,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 성부에게서 쫒아나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이란 문구가 추가 되었다.

그것은 그후 니체아·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서 전례에 채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엔 다만 세례와 결부되었고, 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미사에 삽입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맨 먼저 비잔틴에서 디모데오 총주교(589)에 의해서,

끝으로 로마에서는 1014년에 가셔야 하인릭히 2세 황제의 요청에 따라 미사에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때 견해의 차이가 생겼다.

 

즉 동방은 성령의 유출을 '성령이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쫒아 나심'으로 알아 들었고,

반면 서방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쫒아 나심'으로 알아 들었다.

서방에서 '필리오퀘'(…와 성자에게서=Filioque)를 첨가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확대로서가 아니라 다만 해석으로 생각하였다. 반

면에 동방에서는 그것을 신조의 변조라고 하며 서방에게 이단의 죄를 씌웠다.

이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제1차 공의회(381)의 불분명에 기인한 '필리오퀘'는

1054년의 분열의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차이점의 하나로 지속되고 있다.

 


※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 한 분이신 하느님을
◎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밑줄 부분에서 모두 고개를 깊이 숙인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례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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