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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교황직의 중세기적 우위성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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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직의 중세기적 우위성

 

1197년 하인리히 6세 황제가 강력한 제국을 구축하던 중 겨우 32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두살짜리 아들 프리드리히 2세를 계승자로 남겨 놓은 반면에,

수개월 후 로마에서 노쇠한 첼레스티노 3세(1191~1198)에 이어 중세의 가장 강력한 교황,

37세의 정력적인 인노첸시오 3세(1198~1216)가 교황직에 올랐을 때, 

독일에서는 제위 계승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제국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바로 이제 교황직이 전 서구교회에 대해 그의

수위권적 지위를 완성하는 동시에 유럽의 국제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이 추구하여 마지 않았고 그레고리오 7세가 그의 교황지령(1075)에서

요구하였던 것이 인노첸시오 3세 때 실현되었다.

그는 최고의 입법자, 재판과, 지배자로서의 '완전한 권력'을 지니고,

그 최고 권력을 절대적 확신을 갖고 전 교회 위에 행사하였다.

그런데 이 교회는 서구의 그리스도교 세계와 한덩어리가 되어 있었으므로

제 민족의 정치적 운명도 이와 관계가 없을 수 없었다.

 

인노첸시오 교황이 속사俗事에 관여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은,

이 세상 사물도 다만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된 질서에 순응해야 하고,

왕과 제후들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책임과 확신 때문이었다.

세상은 그에게 하나의 위계제도, 다시 말해서 하나의 '거룩한 질서'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순 정치적인 것과 순 영적인 것, 교회와 국가간의  미묘한 구별이 아직은 뚜렷하지가 않았다.

교황은 '인간의 죄악에 입각하여' 이 질서가 도덕적 과실 또는 객관적 불의로 인해 교란될 때,

언제나 간섭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 세계의 우두머리인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란 자기 표현의 신념과 동시에

모든 미결사항에 대한 '세계의 재판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1198년의 독일의 왕위 계승 문제에 간섭하였고,

1209년 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 섬을 독일왕국에 병합하려는 정책을 펴자 그를 폐위시키고,

대신 그 사이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를 독일 왕으로 승인하면서 시칠리섬의 병합을 하지 않겠다는

선서를 하게 하였다. 그후 영국, 아라곤, 포르투갈, 덴마아크, 폴란드, 보헤미아, 항가리, 달마시아,

기타 小 영토의 왕들도 그들의 국토를 교황으로부터 봉토封土받았다.

이로써 옛날 황제의 임무이던 법과 평화의 유지가 교황직으로 넘어갔고,

교황에 대한 복종제도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은 완전히 교황의 강력한 윤리적 권위에 근거

둔 것이었다.

 

인노첸시오는 대내적인 면에서 교회법을 어긴 주교 선거에 단호히 개입하고,

이른바 '중대사건'을 로마 교황청에 유보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교황의 수위권을 관철하였다.

교황은 교황의 직책상, 즉 '직무상' 부당한 고위 성직자와 주교들을 교황청 종교재판에 회부함으로써

그들을 다스렸다. 이단자에 대해 그는 처음에 그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였다.

그의 평화적 개종 시도가 실패하고 또한 그의 사절이자 시토회원이 남프랑스에서

카타리파에 살해되자(1208년 1월) 그는 1209년 십자군을 평성하였다.

이 기도가 놀랍고, 참으로 부끄러운 유혈로 진행된데 대한 책임은 교황보다는 교황사절이었던

몽포르의 백작 시몬의 광신 때문이었다.

 

교회 안에서의 청빈운동과 그 의의를 정확히 인식한 것은 역사에 남을 인첸시오의 업적의 하나이다.

그는 '억검파'를 각별히 돌보았고(1208) , '가톨릭 빈민회'를 창설하였으며(1208) 무엇보다도

아씨시의 프란치스꼬가 1209년 그의 작은 공동체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간청하고자

로마를 찾았을 때 그를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탁발수도회는 곧 교회의 가장 강력한 발판이 되었다.

인노첸시오는 모든 세력확자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로 그들과 공통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富와 사치를 내적으로 멀리한 것으로써, 교황 자신도 그 유혹에 떨어진 적이 없다.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개회하여, 그 공의회의 개정규정은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고 강화하는데 크에 기여하였다.

'전질변화'의 교리결정과 매년 부활절의 고백, 영성체 규정은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

불행히도 이 정점은 동시에 전환점이 되었다.

인노첸시오 교황은 공의회가 끝난 후 곧 사망하였다(1216)

그의 후계자들은 애써 얻은 교황의 지위를 지탱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아주 어려운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지배는 비록 교회가 아직 제민족의 생활이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윤리적

원칙에 의해 지도되도록 잘 배려했을지라도 결코 교회의 임무가 될 수 없었다.

종교가 정치와 결합되면 해를 입는다.  대사제의 직무는 비단 영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세속적 목표를 배려할 때에도 명망에 손실을 받는다.

인노첸시오 후계자들에게 있어서는 고상한, 보편교회적인 이념들이 점점 후퇴하여,

마침내 중세 후기, 르네상스 시기, 종교개혁기에 이르러서는 영토상의 문제들과

교황령의 확대와 유지가 종종 보편교회의 관념을 능가하는 수가 많게 되었다.

이후 정치적 상황은 격동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슈타우펜 왕가는 남부 이탈리아 지방을 병합하기 위해 투쟁했고,

인노첸시오 4세(1243~1254)는  슈타우펜 왕가로 부터의 포위되는 위험을 막기위해

남이탈리아, 시칠리, 나폴리를 교황의 봉토로서 안쥬의 샤를르(프랑스 왕가)에게 양도하였다.

결국 치열한 정치적 군사적 공방 끝에 샤를르가 슈타우펜가에 승리함으로써 이 문제는 끝이 났다.

이리하여 슈타우펜 왕가의 제권은 비참하게 종말을 고했고, 

프랑스는 이제 유럽의 가장 강한 세력이 되었다.

교황직이 애써 얻어낸 그의 우위를 프랑스 민족 국가에게 양도해야 할 시기는 머지 않았다.

교황직은 불명예스럽게도 프랑스에 예속되기에 이르렀다.

 

완전히 일변한 세계에서 교황의 지도권을 다시한번 과시하려고 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1294~1303)의

시도는 마치 하나의 기이한 시대착오처럼 보인다. 지나치게 권력 의식을 지닌 천성적인 지배자,

그러나 종교적 깊이가 없고, 인생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부족했던 그는 교황의 신정적神政的 서구

국제국가의 설립을 꿈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교황직의 위신이 그간 제권과의

정치적 세력 투쟁으로 엄청나게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그가 프랑스의 세계지배를 추구하던 필립 미왕(美王)(1285~1314)에 대하여

교황직의 영적, 정치적 우위를 관철하려 하였고 또한 '우남 쌍땀'(1302)의 대칙서에서

'양검론'을 끌어대어(이 이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루가 복음 22장 38절에서 양권력,

즉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다만 교회에 맡겼다) 교황에 대한 순명이 어떠한 경우에도

구원에 필요한 것임을 선언하였을 때, 격렬한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필립은 교황의 파문에 대하여 그를 공의회에 공소함으로써 응수하였고,

1303년 9월 소수의 군대로 하여금 그를 아나니성에서 체포하게 하였다.

비록 아나니의 시민들이 벌써 이틀 후에 교황을 해방시켰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폭력행사는 교황직을 완전히 무력함과 정치적으로 무의미함을 충분히 드러냈다.

교황은 저항할 힘이 없었다. 그는 그의 세계지배의 꿈이 깨어진후 얼마 오래 살지 못하고,

몇주 후에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교황직의 보편적, 중세기적 우위성응 그와 더불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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