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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동로마(비잔틴)제국의 멸망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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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비잔틴)제국의 멸망

 

15세기에 교회가 해결해야 할 2대 과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대내적인 개혁과, 회교 앞에서 생존투쟁을 하고 있는

희랍교회를 돕는 이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다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17차 공의회는 바젤에서(1431~1437)  페라타(1438)로,마침내 피렌체(1439~1442)로 옮겨졌었다.

주요과제는 동방교회와 일치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황제 요한 8세 팔레올로고스(1425~1448)는

직접 7백명의 사절단을 이끌고 1448년 3월 페라타에 나타났다.

그중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와 니체아의 베싸리온도 있었다. 교황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동로마 교회가 서구로마교회와의 일치를 희망하게 된 이면에는 무엇보다도 점점 저항하기 어려워진

터어키인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한 도움이란 절실한 소망이 있었다.

거대한 십자군만이 비잔틴을 그 멸망에서 구할 수 있었다. 오랜 어려운 협의 끝에 교회의 일치가 실제로 성립되었다.

비잔틴 황제와 교황은 일치교령'레벤뚜라 첼리'에 서명하였다(1439.7.6)

로마교회의 동방교회에 대한수위권과 '필이오케' 문제까지도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황제가 동방으로 돌아간 후, 서방교회에 대한 그의 양보가 거의 공감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거대한 군사원조도 오지 않았을 때, 일치는 이미 유지될 수 없었다.

 

서구는 이미 일치를 잃었다. 십자군은 민족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만 민감하였으므로 성취될 수 없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1448~1453)는 다시 로마에 도움을 청하였으나 헛일이었다.

 터어키인과의 전쟁은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망을 점점 압축시켰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수비대 7천명)은 용감히 방어하였으나 터어키인(병력 약 10만)의

공격에 결국 함락되었고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전사하였다.

물론 정복자들이 저지른 무서운 학살과 수천 시민이 노예로 끌려간 사실은 서구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459년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의 유산을 이어받았고 미구에 그것은 '제3의 로마'로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동로마(비잔틴)제국(330~1453)은 1천년 이상의 지속끝에 결국 역사속에서 사라지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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