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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예루살렘부터 로마까지의 신생교회 (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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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부터 로마까지의 신생교회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으로 부터 땅 끝에 이르기 까지" 복음의 개선 행진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감동적이고 열렬한 포교활동과  또한 사랑으로 가득했던 원시교회의 내적 생활에 대하여

자세한 사정을 전해주고 있다.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1.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태 * 그리스도교적 시기(사도 1~9,31)'

2.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한, 유태 * 그리스도교로부터 이방인* 그리스도교로 넘어가는 시기(9.32~15,35)

3. 바울로 사도의 이방인에 대한 포교시기(사도 13~28)

 

예루살렘 모교회는 처음부터 특별한 존경을 받았다.

베드로의 지도하에 같이 교회를 지도하던 사도들이 여기서 그들의 주님에 대한 산 증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개념언어와 예배형식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갓난 교회는 아직 자신을 유대교의 실현으로 자각하고, 유태교의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전통적인 유태교의 신심 형식에서 생활하고, 유태교 조직의 기본원칙을 이어 받았다.

(교회의 조직, 장로와 사제, 불변의 전권을 지닌 교직자들 통한 기도)

그러나 동시에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과 더불어 고유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감사하는 마음과 그리스도의 죽음의 전례적 재연을 통해 고유한 경신례敬神禮를 가졌는데,

그들은 "빵은 나누고 기쁘고 순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으면서"(사도 2,46) 성찬식을 지냈다.

이러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교회의 공동체 생활과 제도, 신심과 기도규정이 결정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른바 예루살렘의 사도 회의(50년경)에서 최초의 어려운 결정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앞으로 신생교회를 위해 큰 의의를 갖게 되는 것으로서, 즉 이방인으로서 개종한

그리스도교인은 근본적으로 유태교 율법의 구속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사도 15,6 이하 19)

 

비록 교회의 내부 구성이 처음에 12사도단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러나 베드로에게 그 지도적 역할이 돌아갔음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다.

바울로는 베드로와 나란히, 야고보와 요한을 교회의 '기둥'으로 형용하였다.(갈라 2,9).

베드로가 예루살렘을 떠난 후(43~44년경, 사도 12,17) 비로소 야고보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는 교회 전통에서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로 불리게 되었다. 

사도회의에서 처음으로 '사제들'이 나타나고, 이보다 앞서 스테파노를 선두로 7명의 부제가 임명되었다.(

사도6,1 이하) 이렇게 교직자의 위계제도가 완성되었다.

즉 사도, 주교, 사제, 부제는 예루살렘 교회의 정식 지도자들이었다.

 

유태인의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유태인이 율법을 엄수함으로써 처음에

그리스도교 교인들을 유태교의 한 종파로 나타나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롭고 전형적인

그리스도교의 모습이 처음부터 예수의 제자들을 '유태인의 회당'과 극복하기 어려운 대립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곧 유태교에서 분리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 그리스도를 '귀리오스(하느님)으로 부르는 기도,

성체성사 집전, 신앙의 형제들의 공동생활을 위해 사유재산까지 바치도록 충동한

그 고유한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공동체(사도 2,44 이하) 등은 유태인들에게 불신과 거부를,

마침내는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그리스도 신앙은 공공연한 충돌을 일으켜

두 차례의 충격적인 박해로 울분을 터뜨리게 했다.

 

최초의 박해는 32/33년 스테파노를 돌로 때려 죽이고 희랍계 유태 그리스도교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게 하였고,

나아가서 사울에 의해 박해가 계속되었는데, 사울은 33/36년 사이에 다마스코 앞에서 귀화하고 바울로란

이름으로 곧 그리스도교 포교의 '간택된 도구' 구실을 하게 되었다.

(사도 9,15) 헤로데 아그리빠 1세 임금(37~44)이 일으킨 두 번째 박해는 42/43년에

사도 長 야고보의 순교를 초래하였고 또한 베드로를 잡아가두기에 이르렀으나 베드로는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났다.

 

박해는 주로 희랍계 그리스도교인, 즉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디아스포라 유태인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그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세계로 전파되는 적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히브리계 유태 그리스도교인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유태인의 종교의식과 성전 임무에 대해 각별한 성의를 보임으로써 유태인의 호의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립은 결국에 가서 드러나게 되어 새로운 폭발을 일으켰다.

62/63년 경 사도 次 야고보가 돌로 타살되었다. 요셉 플라미우스에 의하면 대사제 아나노스는

62년 부화축일에 지방 총독의 공석 기간을 이용하여 성공적으로 활동하던

'예수의 형제'와 다른 몇몇 신자들을 위법으로 고소하고 유죄판결을 내리게 하였다.

오랜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형제'를 종탑 위에서 밀쳐 떨어 뜨린 다음 피혁업자를 시켜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유태전쟁(66~70) 시초에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루살렘을 떠났기 때문에

유태인으로부터 배반자요 배신자의 낙인이 찍혔다. 증오가 증대됨에 따라 결국

그리스도교인들은 100년경 '유태인 회당'을 통해 공식으로 추방되었다. 바르 코고바 때(132~135)

로마인에 대한 유태인의 마지막 봉기로 유태인들은 팔레스티나의 그리스도교인들을 다시 박해하게 되었다.

이로써 유태인과 그리스도교인 사이의 분리선이 결정적으로 그어지고,

양측에 아주 불행하게 작용하게 될 적대관계가 시작되었다.

 

미구에 유태인들은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박해에서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선동자로서

숙명적인 역할을 몇번이고 되풀이하였다. 한편 유태인들은 콘스탄티누스 전환기 이후,

무엇보다도 중세에 있어서 상喪을 당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대립은

근세의 인종에 관한 반유태주의 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70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더불어 예루살렘 교회의 특수한 우위성도 끝났다.

 

안티오키아의 교회 : 안티오키아는 우선 최초의 이방인 교회로서,

또한 그리스도교 포교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소위 안티오키아의 논쟁 문제는(사도 15: 갈라 2,11 이하) 유태인 그리스도교인과 이방인

그리스도교인과의 관계를 해명하게 하였다. 이 교회들은 대부분 비유태인으로

구성되었던 것은 분명하고 그래서 그 교회들이 이미 유태교의 종파로 보이지 않았고,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인 또는 '그리스도인'(사도 11,26)들의 독립된 종교단체로 불리게 되었다.

바울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를 유태교적 팔레스티나의 고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을 헬레니즘의 희랍 로마 문화 중심지의 하나인 안티오키아로부터 세계에 전파하였다.

그는 개종한(33년 경) 36년 이후 우선 3년간 아랍 사막으로 가서

그의 사도적 소명을 준비한 다음 바르나바의 초청으로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르나바와 같이 바울로는 "성령께서 주신 사명을 띠고"(사도 13,4)

그의 첫번째 전도여행(45~48)을 계획하고 키프르스섬과 소아시아를 방문하였다.

두번째 전도여행(49/50~52)에서 바울로는 소아시아를 지나 유럽으로 전진하였고,

세번째 전도여행(53~58)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는데, 처음으로 여기서 붙잡힘으로써 그의 여행이 끝났다.

이 기간 동안 바울로는 그의 훌륭한 고린토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등등의 서한을 썼다.

 

로마 교회의 기원: 로마교회는 바울로가 57/58년 겨울에 고린토로부터 그의 로마서한을 보냈을 때

벌써 꽤 번영하고 있었다. 황제 전기작가 수에튼의 보고에 의하면 벌써 수년 전에(50년 경)

로마의 유태인들 중에서 그리스도 때문에 소동이 일어 났었다

("선동자 그리스도 때문에 끊임없이 소동을 일으키는 자들을 로마에서 쫒아 냈다.")고 한다.

그리고 바울로는 이때 추방당한 사람 중에서 두 사람, 즉 아킬라와 부리스킬라 부부를

그의 제2차 전도 여행 중 고린토에서 알게 되었었다.(사도 18.2)

바울로는 이 사람들로부터도 로마 신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었을 것이 분명하고

그때 벌써 직접 로마 여행을 계획하였을 것이다. 로마 사람들도 벌써 최초의

성령 강림 때 예루살렘에 왔었다(사도 2,10) 그러므로 벌써 오래 전부터 로마에 신자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이 신도 집단을 창설하였을까?

 

로마 교회의 가장 오랜 전통응 그 창설을 항상 베드로에게 돌렸다.

베드로는 42/43년 예루살렘에서 도망한 다음 '다른 곳으로 갔다'(사도12,17)고 하는데

곧 바로 로마로 갔던 것일까?

아니면 조금 후에 간 것일까? 이러한 사실은 비로 베드로가,

예컨대 50년 사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다시 왔을지라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또 바울로가 그의 로마서를 썼을 때(57/58),

또는 그가 로마에 잡혀 있을 때 베드로가 로마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로마교회를 창설한 다음,

전도열에 자극되어 곧 다른 데로 떠났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로마에 체류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63/64년 베드로가 로마에서 쓴 베드로 1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네로 황제의 박해동안,

아마 64년 7월 로마에서의 그의 순교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여 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교 사실은 최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에서 발굴에 의하여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되었다.

베드로의 무덤이 완전히 어느 것인가 아니면 저것이냐에 대해 어떠한 의구심도 남지 않을 정도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이로써 가장 오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결같은 전통을 통해 전해지는

베드로의 로마에서의 순교는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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