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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교의논쟁과 동방의 공의회들 / 그리스도론 (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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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논쟁과 동방의 공의회들(2)

 

2. 그리스도론에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人性에 대한 神性의 상세한 관계를 밝히는 일이었다.

성서는 이 점에 관해서도, 그리스도의 神的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숙고가 없는 언급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 점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의 유명한 두 신학파는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신성을 매우 중요시한 반면에 안티오키아는 인성을 중요시하였다.

 

오리제네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神人'이란 낱말로 표현했었다.

우의적禹意的 성서해석과 플라톤적인 사색의 영향을 받은 신학적 사변은

오리제네스로 하여금 보다 깊고 긴밀한 로고스 신비에 도달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신성과 인성의 상봉이 그리스도에게서 최고로 실현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신자들에 의하여 실현되어야 한다는 사상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후 수도자들은 즐겨 오리제네스와 관련시켰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치릴로는 412년부터 그 도시의 주교였는데,

양성의 결합을 가능한한 긴밀하고 실제적인 것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하나의 물리적인 결합 및 '사람이 된 로고스의 하나의 성性,

즉 신인적神仁的 性 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직접적인 혼합은 부정) 

그리고 그는 비유로서 작열하는 석탄에서 불과 석탄이 오직 하나를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성과 인성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처럼 결합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시기에 안티오키아의 신학도 계속 발전을 보였었다. 

타르소의 디오도로(394년 이전)느 그가 오래동안 교편을 잡았던 안티오키아 신학파의 냉정하고,

비판적, 성서주석학적인 방법을 따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간성을 매우 강조하였고,

양성의 외적인 결합밖에 남지 않을정도로 신성과 나란히 인성을 자립시켰다.,

즉, 신적인 로고스가 인간 예수 안에서 마치 성전처럼 거처를 취했다는 것이다.

 

안티오키아파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트리우스(428년 이래)는 여기서부터, 

실은 마리아가 '천주의 모친으로 불릴 수 없고, 다만 한 인간 예수를 낳은 한에서 단순히

'그리스도의 모친'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알렉산드리아파와 예리하게 논쟁하였다.

논쟁은 '천주의 모친'이란 칭호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그리스도론적 문제가 있었다.

 

신학파의 의견 대립에 이어 곧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의 양 총대주교도 경쟁하게 되었다.

치릴로는 429년 부활절에 에집트의 주교와 수도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네스토리우스를 맹렬히 공격하였고, 교황 첼레스티노1세(422~432)의 지지를 얻었고,

12개조의 파문문(破門文)을 작성하여 교황의 이름으로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내고 동시에 철회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12개조의 반파문문(反破門文)을 작성하였고,

비잔틴의 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425~455)를 자기 편으로 끌어 들인 다음 황제로 하여금

서로마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2세(425~455)와 같이 공의회를 소집하게 하였다.

 

431년 에페소의 제3차 공의회는 소란하게 진행되었다. 쌍방에서 악의적 공격으로

가득찬 불유쾌한 음모놀이가 시작되었다. 황제가 간섭해야 했다.

양측의 지도자 네스토리우스와 치릴노는 체포되었다.

마침내 치릴로는 알렉산드리아로 돌아 갈 수 있었으나, 네스토리우스는 상부 에집트로 추방되었고

거기서 451년경에 사망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페르샤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를 세웠고,

그것은 곧 번영하였다. 활발한 수도생활, 뛰어난 신학, 장대한 포교활동이 그것을 증명한다.

선교사들은 말라바르, 인도(토마스 그리스도교도), 터어키스탄까지 전진하였다.

네스토리우스파의 총대주교 디모테오1세 때, 780년에서 823년에 걸쳐

그리스도교는 중국령 터어키스탄을 넘어서 티벳트와 중국의 중심지까지 전파되었다.

14세기 초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중앙 아시아에서만도 10개의 수도 대주교좌를 헤아렸고,

본방인 성직자도 많았다. 이표교지는 불행히도 타멜란의 피비린내나는 박해(1380)로 전멸되었다.

16세기에 네스토리우스파의 대부분은 로마에 병합되었다.

 

그리스도론은 이후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즉 제6차 공의회가 개최된 680년까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의 치열한 공방과 정치적 공방을 낳았지만 결국

이 공희회에서 다음과같이 결의 됨으로써 그 끝은 맺었다.

즉 "그리스도의 신인적 위격에서 신성과 인성은 서로 혼합되지도,

서로 분리되지도 않고 결합되어 있는 두 性에 상응하게, 또한 신적,

인간적 두개의 힘과 의지가 존재하는 바, 서로 혼합되거나 서로 분리됨도 없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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