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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반상식과 간단한 교리를 담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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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교의논쟁과 동방의 공의회들 / 의화 및 은총논쟁 ( 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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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화 및 은총논쟁

 

동방이 삼위일체론과 그리스도론에 종사하고 있는 동안, 서방은 무엇보다도 구세론救世論에 종사하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희랍인들에게 관계되는 바가 컸던 형이상학의 사색보다는, 실천적이고 직접

신자생활을 괴롭히는 일신상의 구원이 더욱 문제시 되었다.

즉, 인간의지의 자유와 죄악, 원시성총原始聖寵과 원죄, 각자의 의화儀化 과정에서의

은총의 필요와 작용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일찍부터 북아프리카에서 도덕적 금욕적인 운동이 나타났었다.

몬타누스설이 그곳에 가장 많이 유포되었고,테르툴리아노에 의해 격화되었다.

테르톨리아노는 그의 저술에서 신심적 윤리적 테마들을 즐겨 다루었다.

그의 엄격주의는, 3세기 중엽 카르타고 교회에서 배교자를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에 영향을 미쳤고,

치쁘리아노도 이단자 세례논쟁에서 이 엄격한 노선을 변호했었다.

 

4세기 초 북아프리카의 도나투스설이 이러한 엄격주의적 열광적인 경향을 옹호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단호한 조치와 니체아 공의회에서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도나투설은 존속되었고,

계속 1백년 이상 북아프리카 교회를 분열시켰다.

동일한 주장들이 영향을 미쳤다, 노바시누스와 그의 제자들, 이른바 '순결파'들은 이완되고

거룩하지 못하다고 모교회를 비난하였다.

 

마침내 400년 경에 영국인 수사, 엄격하고 교양있는 뻴라지우스가 인간의지에 지나치게 신뢰하는

그의 윤리를 갖고 무대에 등장했다. 그는 410년경까지 로마에 살았고,

다음 북아프리카로 갔으며 거기서 아랍으로 갔다. 그의 설은 높은 윤리적 수준을 드러냈다.

그는 윤리선倫理善을 거부하는 마니교를 대항하여 그의 설을 주장했었다.

그것은 교리의 깊이가 없는, 순 실용적인 것에 불과했다. 은총은 거기서 하등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인간은 착하게 행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좀더 쉽게 착하게 행동할 수 있기 위해 다만 은총을 필요로 하였다.

결국 모든 것은 착한 의지에 달여 있다고 하였다.

 

서방에서는 치쁘리아노 이래 근 1백년간 뛰어난 신학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4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밀라노의 암브로시오, 히에로니모, 무엇보다도 아우구스티노가 빛나는 세 별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당시의 희랍의 신학자들과 겨울만한 인물이었다.

그후에 또 大레오와 大 그레고리오가 나타났다.

 

암브로시오

 

그는 트리어에서 갈리아 지방의 지방장관의 아들로 태어났고, 자신도 리구리아와 에밀리아 지방의 총독이 되었다.

374년, 뜻밖에 민중으로부터 밀라노 주교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을 완전히 교회를 위한 봉사에 바쳤고, 서방의 四大 교회학자 중 최초의 학자가 되었다.

그는 설교, 변론, 저술을 통하여 아리우스파와 투쟁하였고, 니체아 신경이 승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출신과 전통이 서구인이고 로마인이었던 관계로 그의 의식은 늘 실천적인 것으로 향해 있었다.

그의 성서주해와 전 신학은 특히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면을 좋아했다.

그는 속죄, 죄악, 은총의 문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금욕운동을 촉진하였고,

그래서 서구 수도생활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그라시아누스(375~383), 발렌티니아누스(375~392), 데오도시우스1세(379~395)

황제들의 친구요 조력자로서 교회정책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미쳤고,

그래서 서방교회의 지도적 인물이 되었다.

정치적 모노피지스설에 대해 양권력兩權力을 옹호한 점에서도 그는 전형적인 서구인이다.

 

즉 정치권력에 대해서는 교회와 종교영역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였고, 국가권력에 대해서는

그 자주성과 시민생활에서의 질서기능을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은, 황제가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양영역에서 홀로 지배할 것을 요구하는(神政政治)

비잔틴의 체제와는 구별된다. 서방의 사고는 정치영역에서도 이원적이다.

제라시오 교황(492~496)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후에 아나스타시우스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그의 양권론으로 명백히 정식화하였는데, 그것은 제권帝權과 성권聖權으로 엄격히 구별하고,

그래서 동로마제국의 양권의 동일화에 반대하였다. 암브로시오는 벌써 그것을 실천했었다.

 

사실 암브로시오는 황제 당국과의 여러번의 충돌을 통해서 국가 교회주의를 과감히 거부하였고,

데오도시우스 대제가 390년 살로니카에서의 잔인한 도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

그로하여금 교회속죄를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사제요,

사목자로 머물렀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다만 사목을 최고의 원칙으로 삼았다.

 

아우구스띠노

 

아우구스띠노는 354년 누미디아의 타가스테에서 이교인 빠트리치오와 열심한

그리스도교신자 모니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으나 세례는 받지 않았다.

후에 그는 그의 젊은 시절의 탈선을 은총의 부족으로 돌렸다.

그는 학생시절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그는 그의 '고백론'(400년경)에서 그의 이러한 탈선을 슬프게 표현하였다.

 372년, 그는 한 사생아를 낳았고, 그를 아데오다투스(389)로 불렀다.

385년에 가서야 그는 이 아이의 어머니와 헤어졌다.

이무렵 그는 마니교에 심취했고 약 9년간, 대략 374~383)에 걸쳐 그는 이 종파에 속해 있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선악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고, 그리스도교를 비판하고 모든 신앙권위를 거부하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그의 어머니하고도 절교하였다.

 

그는 카르타고에서 수사학 공부를 마친 다음 잠시 타가스테에서 문법교사로 활동하였고,

다음 383년까지 수사학을 가르쳤다.

1년간 로마에 체류한 다음 384년 가을에 수사학을 가르치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거기서 암브로시오와 알게 되었고, 그의 설교를 듣고 그에 의해 교회로 돌아왔다.

387년 부활축일에 그는 그의 아들 아데오타스와 함께 암브로시오 주교로 부터 세례를 받았다.

388년 아프리카로 돌아가 타가스테에서 몇명의 친구들과 더불어 수도생활을 하였다.

 391년 초 히뽀를 방문했을 때 발레리우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예비자의 교리교사, 설교가로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발레리우스는 395년 그를

그의 보좌주교로 임명하고 주교로 성성하였다.

396년 그는 히뽀 주교좌를 계승하고 35년간 그 지위에 머물렀다.

그는 반달족이 그의 주교좌 도시를 포위하고 있는 동안, 즉 430년 8월 28일에 사망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인물과 그의 역사적 의의는 모두 지대한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고대사에서 우리에게 가장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고백론'에서 갖가지 미로에서 마침내 그를 올바른 목표로 인도한 하느님의 은총의 인도를 찬양하고 있다.

인간의 허약과 비참함을 스스로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는 오만한 뻴라지우스설에 전력을 다해

대항할 수   있었고 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2년에 시작된 그의 뻴라지우스와의 대결은 격렬하게 진행되었는데, 그것은 체험적인 내막을 분명히 인식하게 한다.

그는 418년에 뻴라지우스파의 단죄를 관철시켰다.

뻴라지우스의 사망(422) 이후에도 그는 자주 이 이단을 공격하였는데, 그것은 흔히 때로는 정도를

지나치고 은총의 전적 작용과 절대적 예정설을 명백히 정식화하는 그런 논전까지 되었다.

 

이때문에 그는 한편으로 '은총의 교사'가 되었고,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후세의

이단자들에게 이단의 연결점을 제공하였다. 루터, 칼빈, 얀세니우스설은 아우구스티노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아우구스티띠노의 정식定式이 자신의 힘으로 구원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인정하기 위한

이단의 반대명제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아우구스띠노와는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우구스띠노도 첫째는 사목자였다. 그는 그의 주교직을 설교, 자선,

 전례를 통하여 지칠줄 모르는 열성을 갖고 집행하였다.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그는 뻴라지우스설, 마니교, 도나투스설 등의  이단과 토쟁하였다.

 비록 그는 늘 수도자적 생활을 하였고, 서구 수도생활의 시조의 한 사람이 되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세계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최고로 사변적인 인간이었고, 예민한 사색에 창의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지식 안에는 전 고대의 철학과 문화가 포괄되어 있었고,

그것을 그는 그의 방대한 저술을 통하여 후세에 전하였다.

그는 중세 서양문화의 위대한 형성자 중 한 사람이 되었고, 여러가지 관점에서 오늘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대등한 상대자가 나타나기까지 중세 신학에서 우위를 유지하였다.

그는 서구의 고대 교회학자 중 가장 위대한 학자이다.

 

아우구스띠노는 그후의 발전을 위해 또다른 관점에서 중요하였다.

사목자 아우구스띠노의 전 존재는 하느님과 영혼들의 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사랑 밖에 모른 그의 활동은 사교도와 이단자에 대한 그후의 진로를 결정하였다.

그는 진리를 찾고 발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젊었을 때 스스로 체험하였다.

주교직을 맡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탈선에 대해 최대의 관용을 베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는 분열이란 무서운 불행을 체험하게 되었다.

북아프리카 교회가 도나투스설로 분열되어 있었다.

도나투스파의 대립교회는 고유한 교계제도와 조직을 갖추고, '순결자', 경건자', 성자의 교회로 자처하였다.

 

또한 가톨릭교회의 신봉자들에게, 특히 가톨릭 주교들에 대하여 불신과 적대와 경멸을 유포시켰고,

비열하고 악의적인 논전의 정신을 모든 본당에까지 유포시켰다.

아우구스띠노에 대해서도 히뽀에 도나투스파 대립주교가 있었다.

이렇게 그는 교회분열이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고 그러나 그것을 제거할 수 없음을 매일같이 체험하였다.

 

아우구스띠노는 그것을 좋게 해결하려 하였다. 그는 서신으로 또한 직접 도나투스파 교직자들과 대화를 모색하였다.

그는 토의도 하였고, 저술을 통해 도나투스파들과 대결도 하였다. 상대방은 거부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선은 벌써 오래 전부터 경화되어 있었다. 치르쿰첼리온파로 불리는, 도나투스파 중에서

종교적으로 과격한 광신자들은 자신을 성인으로, 신앙의 투사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불렀는데

그들은 동냥군으로 또는 무장한 불량배로 지방을 두루 다녔다.

그들은 폭력과 위협을 꺼리지 않았고, 시민생활에서는 사회입법을(노예제도의 폐지, 빈민구제 등등),

교회영역에서는 도나투스설적 의미에서 엄격주의적인 개혁을 요구하였다.

어디에서나 그들은 도나투설의 의 보급을 위해 투쟁하였다.

가톨릭교회를 파괴하고 성직자와 신자들을 학대하는 일이 그칠 줄을 몰랐다.

 국가권력은 거의 1세기 동안 이 광신자들에 대해 속수무책이었고,

반달족의 지배에 이르러서야 이 운동이 종식되었다.(430)

 

아우구스띠노도, 도나투스파 주교들에 의해 선동된 이 광신주의에 대하여

이성과 사랑의 말이 소용이 없음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411년 카르타고에서 개최하고 사회한 종교토론회에서,

286명의 가톨릭 주교들이 철벽같은 279명의 도나투스파들과 대좌하게 되었다.

이 최대의 친절마저도 우이독경에 그쳤다.

그리스도교회의 일치와 평화란 최고선을 위해서라면 아우구스띠노와 기타 주교들은,

만일 도나투스파들이 싱앙공동체로 돌아온다면 자신들의 정직을 사임할 것을 제의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아량은 조소와 거절, 새로운 폭력의 위협을 받았고, 또한 가톨릭 측은,

종교적 광신자들이 가톨릭과의 투쟁에서 패배하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순교로 간주되어 도리어

새로운 위협으로 격려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우구스띠노는 '억지로라도 데려와라"는 "쓰라린 말의 정당함을 깨닫게 되었다

." 결국 사랑을 법과 강제에 예속시킬 때 진리에 더 잘 봉사하는 것인지,

또는 강제를 사랑에 예속시킬 때 진리에 더 잘 봉사하는 것인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는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신앙문제에 있어서 강권의 적용을 성서적으로 시인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큰 잔치의 비유에서 그리스도는 초대받은 사람들이 잔치에 오기를 거부하므로

주인으로 하여금 중에게 이렇게 말하게 했었다.

"그러면 어서 나가서 길거리나 울타리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억지로라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도록 하여라."(루가 14.23)

아우구스띠노가 여기서 반항하는 이단자나 이교인을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로 들어오도록 강요할 수 있다고 본 것은 완전히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잘못된 해석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짐작하지 못했다.

이 견해는 미구에 "이단자들은 그들의 본의사가 아닐지라도 그들 자신의 구원으로 강요되어야 한다

."고 법문화되었고(그라시아누스의 법령집), 이러한 권위에 의거하여

마침내 그것은 중세기의 종교재판의 기초가 되었다.

루터도 1525년 농민들에 대하여, 그리고 수년 후에는 재세례파에 대한(1529)

그의 불행한 처사에서 이 원칙을 끌어댔고, 칼빈도 그것을 근거로 하여

제네바에서 피비린내 나는 신앙재판을 실시하였다.

 

신약성서에 종교영역에서 강제조치를 시인한 사례는 없다.

성서는 신앙을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귀의로 볼 뿐이다.

자신의 오랜 탈선 끝에 개종을, 은총의 부르심으로 체함한 바로 아우구스띠노가

후세의 그릇된 발전의 책임자로 낙인찍혀야 한다는 것은 수수께끼 같은 신비이다.

 

히에로니모

 

히에로니모는 374년경 달마시아의 스트리돈에서 태어났고,

일찍부터 로마로 가서(약 354년) 거기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갈리아 지방을 여행하는 도중 트리어에서 수도자 집단을 알게 되었고, 수도생활을 할 결심을 하였다.

아퀼레아에서 그는 한동안 금욕가 친구들과 같이 생활하였다.

그 다음 그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도중 병에 걸렸고, 안티오키아에서 성서주석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는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배웠다. 375~379년 사이에 칼키스 사막에서 경건한 은수생활을 하였다.

379년 사이에서 사제로 서품되었고, 나찌안쯔의 그레고리오와도 친하게 되었다.

그후 다마소 교황이 그를 로마로 불렀다. 그는 382년에서 385년까지 교황의 자택에서 지냈고,

교황의 위임으로 라틴어 성서의 원문을 수정하였다.

후의 이른바 불가타(라틴어 성서)는 이때의 연구결실이었다.

교황의 신임을 얻었고 그래서 교황으로부터 그의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것같다.

 

그러나 다마소의 사망 후(384년 12월 11일 그는 선거에서 무시되었다.

그는 그의 금욕적인 생활과 ― 그는 로마의 금욕주의자 사회의 중심 인물이었다―

로마 성직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때문에 인기를 잃었었다.

그는 로마를 떠나(385), 안티오키아를 거처 빨레스티나와 에집트의

여러 수도자들의 정착지를 방문하였다. 마침내 386년에 베들레헴에 정착하였고

거기서 419년 내지 420년 9월 30일에 사망하였다.

 

열심하고 돈 많읁 바울라가 로마에서부터 그를 따라왔었다.

그녀는 베들레헴의 세 개의 여자 수도원과 한 개의 남자 수도원을 ― 후자는 히에로니모가 지도하였다

 ― 짓는 데 재력을 댔다.

히에로니모는 여기서 34년간에 걸친 끊임없는 활동을 통하여 분량과 내용이 거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는 "의심없이 모든 라틴 교부 중에서 최대의 학자이며, 당시의 최대의 석학이었다"

 주로 그의 흥분 잘하고 격하기 쉬운 다혈징인 성격과 신경질적인 기질로 인한

단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결하고, 정직하고, 완전히 수도자적 신심으로 충만했던 그리스도의 투사였가.

 

그레고리오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590~604)은 8세기 이래 서구의 四大 교회학자 중 네째로 간주되었다.

그는 540년경에 태어 났는데, 때는 벌써 완전히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는 원로원 의원인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이미 572/573에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다.

부친 고르디아누스의 사망 후 그는 화려한 세속생활을 단념하고(575년경),

로마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조하여 안드레아 성인에게 봉헌하였다.

 

그후 그는 또 6개의 수도원을 그가 상속받은 시칠리아의 소유지에 세우고,

스스로 엄격한 금욕가로서 수도자적인 고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벌써 579년에 그는 그의 고요한 생활을 떠나야 했다.

교황 뻴라지오 2세는 그를 콘스탄티노플에 대리사절로 보냈고,

그는 거기서 585년까지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는 비잔틴 황실의 분쟁의 와중에서도 수도자처럼 기도와 신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의 수도원으로 돌아 갔으나 계속 교황의 조언자로 있었고,

590년 교황의 사망 후, 그의 정직하고 단호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역사는 그의 교황 명칭에 大란 별명을 붙였다.

실제로 그의 14년간의 재위기간은 세계사적인 의의를 획득하였다.

보존된 854편의 서한은 그레고리오의 다방면에 걸친 내외적 활동을

일별케 하는 동시에 그의 고결한 인품을 인식하게 한다.

 

우선 그는 교회의 소유지의 적절한 조직과 수익의 증대를 통해, 게르만족의 침입과 민족이동의

여파로 큰 궁핍에 처한 주민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교회를 올려 놓으려고 했다.

기아와 전염벼이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교황은 사목적, 사제적, 사회적 책임에서

인간들의 절망적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온갖 계획을 세웠다.

그는 곡식을 분배하였고,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대농장의 농부들을 착취로부터 보호하였고,

비잔틴이 거부하므로 또한 로마시와 국토의 정치적, 군사적 수호를 떠맡았다.

랑고바르드족이 592년 593년에 로마를 포위하였을 때 그는 평화적인 담판으로 그들을 퇴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레고리오 교황의 서구 지향은 획기적이고 선견지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비잔틴에 대한 이탈리아 및 로마교회의 불공평한 종속을 끊고 독자적인 정치를 추진하였다.

그는 앞으로 게르만 민족이 지니게 될 의의를 명백히 인식하였다.

그는 먼저 프랑크 왕실과 우호관계를 수립하였다.

다음 영국으로 눈을 돌리고, 앵글로 색슨족의 그리스도교화에 착수하고, 596년에는

로마의 그의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 아우구스띠노를 40명 가량의 수사들과 함께 선교사로 파견하였다.

 

아리우스파인 西 고오트 왕국에서는 렉카레드 왕의 집권과 더불어(586) 변화가 이루어졌었다.

그레고리오는 서 고오트족의 아리우스파로의 전향을 저지하고, 그들의 교회를 로마교회와

긴밀히 연결시키고자 열심히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랑고바르드족이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도록 개척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위해 가톨릭 여왕 테오드린드가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또한 그는 삼장논쟁三章論爭 이래 계속되던 밀라노교회와 로마교회간의 이교를 마침내 제거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상부 이탈리아에 새로운 교회발전의 기초를 놓았다.

이 모든 것이 그레고리오와 그의 교황직으로 하여금 일찍이 없었던 서구에서의 지도자적 위치를 얻게 하였다.

 

☜ 삼장논쟁: 신학자 3인과 그들의 저서를 둘러싸고 행해진 6세기의 논쟁.

그 동기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받아들인 황제 유스티아누스가 분열의 위기에 처한

제국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 치루스의 테오도레도,

에데사의 이바스 등 안티오키아의 신학자 3명을 네스토리우스파로 단죄했던 데에서 찾을 수 있다.

황제의 아 단죄 칙서(543)는 곧바로 서방교회의 강력한 반발을 유발시켰다.

대부분의 주교들은 3인의 신학자들이 저술한 내용이 네스토리우스파이단을 비호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네스토리우스파 문제는 일찍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비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확고히 정착시키기 위해 동방의 여러 주교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소환된 교황 비질리오(Vigilius)에게 그 칙서를 승인하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교황은 이 칙서를 승인했고 서방주교들의 격렬한 항의에 직면하여 승인을 취소하였다(550년).

551년 황제는 또다시 3인의 신학자들을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제 5차 공의회를 소집하였다(553년).

교황 없이 열린 공의회는 황제의 칙서를 승인했고, 황제는 교황을 협박하여 또다시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따라 동방과 서방간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교황직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삼장논쟁은 일부 지역에서 70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가 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더욱 컸다.

그는 성직자의 생활을 개혁하였고, 이를 위해 그는 벌써 교황 재위 시초에

사제생활 및 사목자 활동의 大 강령인 '사목규정'을 저술하였다.

마침내 이 저서는 전 중세기 동안 사제양성의 기초가 되었다.

욥서에 대한 윤리신학적이고 실천적인 해설서인 그의 '욥서 해설'(595)은

중세기의 윤리신학과 수덕신학의 기본 교과서가 되었다.

그는 '대화'란 4권의 저술에서 특히 서구 수도자의 위대한 

시조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를 소개함으로써 그를 처음 알리고, '서구 수도생활의 본연의 시도'로 만들었다.

 

전례분야에서 그는 미사를 개혁하고 미사전문을 오늘의 형식으로 만들었다.

아마 그는 그레고리안 성가도 개혁했을 것이다.

그를 소위 그레고리안 합창곡의 창시자로 간주해야 할 것인지 또는 간주한다면

어느 정도로 해야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새로운 찬가를 작사 작곡하고, 음악론까지 저술했다는 것은 후세의 조작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로마의 음악학교를 세웠을 것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아우구스띠노와 나란히 중세기의 정신적 아버지요 스승이 되었다.

물론 그는 아우구스띠노의 위대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전환기의 인물로서, 새로운 미래의

개척자로서의 그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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