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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고대교회의 금욕과 수도생활 ( 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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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교회의 금욕과 수도생활

 

약 40년 전부터 수도생활을 좀더 깊이 이해하려는 새로운 노력이 나타났다.

새 연구는 비단 수도생활의 기원만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교적 실체도 명백하게 하였다.

동시에 그 운동이 많은 작은 시냇물들이 합류하여 벌써 초기에 큰 강물이 된 사실도 증명되었다.

유사하거나 또는 동일한 종류의 금욕적 이상이 그리스도교 밖에서 확인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등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고독과 고요함과 내면화, 도덕적 완성 등등을 갖고자 하는 노력은 일반적으로

인간의 욕망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가장 훌륭한 인물들은 항상 그와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완덕 추구도 그 자연적인 면에서는 이러한 인류의 동경이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교적 세계에 수도생활과 유사한 것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그 '인간적인' 것에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계시와 은총의 영향으로

어떻게 되었는가를 보는 데에 있다.

 

수도생활의 본질

 

그리스도교의 수도생활은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본질에서가 아니고는 이해할 수 없다.

수도생활에서 교회의 참된 자아실현의 일부가 발견된다.

수도생활은 그 기원을 복음에 힘입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서, 하느님에게 남김없이 모두 바치는 것이고

'복음의 세 권고'를 충실히 따름으로서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것이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고 나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마태 16,24 이하) 하느님만을 위해서 또한 그의 은총에서 생활하려는 것,

그것이 이 그리스도 모방의 목표이다.

 

그것을 달성하고 또한 그 과정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하여 예수의 참된 제자들은,

그들의 재산을 단념하고(청빈), 그들의 육체와 가정의 행복을 단념하고(독신, 하늘나라 때문에 결혼을 단념하는 것),

마침내 그들 자신의 자아를 단념한다(순명, 남에게 복종함). 어떤이들은 그것을 많이 하고 또 어떤이들은 적게 한다.

절대적인 척도는 복음에 정해져 있지 않다. 완전한 헌신은

'다만 그 말을 받아들일만한 사람(마태 19,12)에게, 그러나 의무로서가 아니라 권고로서 주어졌다.

구원은 모든이를 위해 있는 것이다. 만일 구원이 소수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것이라면

구원의 보편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교회는, 완덕을 추구하는 금욕가들만이 아니라 나약한 자와 작은 자들

―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도 죽었으므로 그들도 구원되어야 한다

―을 위해서, 즉 양자를 위해 충분한 자리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한편으로 완덕의 추구를 시인하고 장려하는 것은, 또한 대중을 모든 시대에 걸쳐,

사랑을 다하여 받아들여야 하는 교회의 의무에 결코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온갖 유의 일방화는 교회의 책임인 구원사명의 부인을 의미한다.

그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이단이다.

교회를 협소하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교회에 손해를 끼치는 것은 아무곳도 없다.

 

교회는 처음 몇세기 동안 항상 이와같은 협소화의 위험에 대항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위험에 패배 당할 유혹도 컸으니 거기에는 늘 인간을 열광적으로, 극단적인

헌신에서 완덕의 길로 나아가도록 매혹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러한 이상주의로 충만했던 사람들은 물론 감격적이고, 신심깊고 '특능特能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원시교회에서 우리는 자주 그러한 금욕가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공동체에 봉사하였고, 귀감으로 간주되었고,

박해시대에 있어서 빛나는 별들이었다. 바울로는 고린토 서한에서 벌써 그러한 그룹을 지적하고 있다.

(1고린 7장) 바울로에게 있어서 하늘 나라 때문에 금욕하는 것은 특별한 은총으로서,

임박한 세상 종말에 직면하여 중요성을 갖는다. 그러나 바울로는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십시오"(1고린 7,20)라는 말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이에게 '복음의 권고'를 법으로 의무화하는 데에서 '이단'이 시작되었다.

2세기의 그리스도교의 일반적인 열광 속에서 '엔크라트파' ―170년경 널리 전파되어 위협적인 규묘가 됨,

엄격히 육체를 적대시하는 금욕적인 경향의 주장자들로서, 신자들에게 육류, 술, 부부관계까지

완전한 절제를 요구함 나아가 신자들이 결혼을 단념해야 한다고 주장 ― 가 자주 등장하였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교적 생활이란 곧 엔크라프파식의 생활을 의미하였다. 그것을 원하지 않거나,

그러한 처지에 있지 못한 자는 교회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나약한 자와 죄인들이 제외되어야 하는 '성인', '순결자', '완전한 자들'의

교회를 이상으로 내세워 사람들을 현혹시켰다. 마르치온, 타시아누스, 몬타누스, 테르톨리아노, 도나투스 등,

요컨대 모든 이단자들은 이와같은 요구를 하였고, 완덕, 신성, 깊은 신심을 그들의 기호旗號로 내세웠다.

이와같은 표어 아래 그후에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단들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투쟁을 유도하였고,

동시에 이완되고, 배반하고, 복음을 위조한 것으로 교회를 비난하였다.

 

그러므로 일찌기 교회가 편파적 이단을 보편화함이 없이 늘 교회 내에서의 정당한 자리를

정당한 완덕 추구 노력에 부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더군다나 수덕修德과 수도생활은 교회생활의 완전한 본질적 구성요소의 하나이다.

그것은 비단 그리스도교적 실현을 위한 어떤 임의적 형식만은 아니고, 또한 성성, 카리스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그리스도교계의 갈망 자체가 그 소명을 위해 표현되는 것이다.

교회는 그것을 필요로 하고, 그것으로써 생활하며, 또한 거기서 세상에 대해, 또한 세상 안에서

그의 활동을 계속하기 위한 힘을 늘 얻고 있다. 교회는 창조물에 대한 모든 개방과 지향에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한순간도 자신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탁신을 계속함에 있어서

교회는 거기서도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생활을, 칼제돈 공의회의 정식을 따라 분리도

혼합도 안되게 적응시켜야 하고, 자신의 임무를 다해야 한다.

 

수도생활의 과제는 세상과의 필요한 거리를 모든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제시하고,

그것을 생활해 보이는 데 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적대시도, 세상에서의 도피도 아니고,

단순히 교회 안에서의 그리스도교적 자아실현을 위한 근본노선일 뿐이다.

수도생활은 모든 시대에 걸쳐 이 임무를 다해야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에서 자신을 잃을 위험에 항상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고 또한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4세기처럼 컸던 시대는 없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전환기'는 엄청난 힘을 해방시켰고, 그것은 대부분 세계를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정복하고 침투시키기 위한 거대한 포교열로 변하였다.

활동가들은 그 목표를 피상적이고 정치적인 방법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력해지는 것도 정치화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대의 필요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으로서 교회 내부에서 수도생활이 벌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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