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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로마와 서방의 수위권 문제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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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권 문제

 

로마교회는 처음부터 전 교회에서 뛰어난 위치를 차지하였다.

로마교회는 가장 역사가 오래고, 가장 크고 또한 서방의 유일한 사도적 교회였으므로 서구에서 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서열은 그(사도적) 창설자에 따라 결정되었는데, 원래 전승은 사도 베드로를

로마교회의 창설자로 지적해 왔으므로, 사도단에서 성 베드로의 지위가 특수하였던 것처럼

로마교회의 우위성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로마는 "이미 일찍부터 교회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지도자가 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제도는 대략 이렇게 발전하였다.

사도들이 세운 개별적 주교좌 성당들이 핵심을 이루었다. 벌써 아주 일찍부터

그중의 많은 교회들이 하나의 조직된 연합으로 결합되었다.

대부분 정치적 수도가 동시에 그 주州의 주교좌 도시들을 위한 교회의 수도가 되었다.

으례 州의 수도는 포교의 출발점이 되었고 그래서 그 州의 도시들은 벌써 모교회와 지교회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다.

수도 대주교들은 예컨대 주교를 선출할 때, 그들은 주교 선거의 유효를 확인하고, 그들을 주교로 성성成聖하였고,

수도관구 교회회의를 소집하고 사회하였으며, 주교 재판소들의 항소심법정이 되었다.

이러한 권리를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카르타고는 북아프리카에서, 알렉산드리아는 에집트에서,

안티오키아는 시리아 들등에서 행사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관용령을 발표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소집한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총대주교 제도'가

공의회의 법률로 확인되었다. 공의회는 로마의 총대주교적 권리 요구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및 기타 '수도 대주교' 또한 총대주교로 전용轉用함을 표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그의 수도를 구(舊) 로마로부터 신(新) 로마(콘스탄티노플, 구 비잔틴)로 옮겼을 때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즉 정치적 중심이 동방으로 이전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권력이 증대될수록

그만큼 구로마의 정치적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2차 공의회에서(381)에서, 알렉산드리아 및 안티오키아보다는 높고,
구로마에 다음가는 명예적 지위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에게 허용되었다.
그러나 총대주교좌 중 로마의 우위는 아직 인정되어 있었다.

 

4세기의 교의 논쟁에서 동방과 서방이 자주 대립하게 되었다.

아리우스파를 둘러싼 대립에서, 로마는 니체아 신경을 고수하였고 동방은 아리우스파를 옹호하였다.

결과적으로 동서방은 서로 파문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러한 분열은 그후 몇세기에 걸쳐 증대되었고,

마침내 1054년에 결정적인 단절로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의 천도는 서방에서 정치적 약화를 의미하였다.

반면 그것은 로마주교에게 교회영역에서의 자주적인 발전을 보증하였다.

서구에는 다만 하나의 총대주교좌가 있었으므로, 여기서는 총대주교직의 발전이

수위권(首位權)으로서의 전도가 더불어 동시에 일어났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요구에 대해 언제나 베드로까지 소급되는 마태오 복음 16장 18절(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을 강조하였다.

 

칼제돈의 제4차 공의회(451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의 논쟁이 주제)에는

명예적 지위에 불과했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에게

로마교회가 차지하고 있는 것과 같은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후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와 같은 수위권적 위치가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것은 전적으로 정치적 지위에 의존한 것이었다.

결국 그것은 비잔틴 황제의 세력권으로 점점 끌여들어 갔고,

동방에서 정치와 종교가 합류할수록 그만큼 총대주교의 지위는 자주성을 잃었다.

 

서방에서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서로마제국의제권(帝權)의 허약은 자연 교회의 독립성을 초래하였다.

 410년 로마는 서고오트족의 알라릭 왕에 의해 점령되고 약탈당하게 되었다.

호노리우스 황제(395~423)는 속수무책이었다. 451년에는 훈족들이 약탈과 학살을 하며 침입해 왔다.

허약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425~455)도 그에 못지 않게 무력하였다.

로마는 무서운 불운에 처하게 되었으믈 깨달았다.

그래서 레오 대교황은 용감히 훈족의 아틸라 왕을 마중나가 로마를 구출하였다.(452).

그의 명망은 백성들에게서 아주 높아졌다. 455년에는 반달족이 로마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모든이들의 시선은 다시 레오 대교황에게로 향했다.

교황은 약탈까지 방지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최소한 가이세릭으로부터 로마를 화제와 학살에서 구출할 수 있었다.

교황직의 지위는 레오에 의해 확고해졌고, 그래서 서로마제국의 멸망(476)을 어려움없이 견디어 냈다.

 

교황 젤라시오 1세(492~496)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그의 양권설(兩權說),

즉 영권靈權은 속권俗權에 예속되지 않고, 각 권력은 그 영역에서 고유한 권능을 갖는다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 중점은 제왕들도 하느님 앞에 셈을 바쳐야하는 한에서 영권에 있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의 통치자들은 공공질서의 영역에서 황제의 법률에 순종해야 한다.

교황은 이러한 뜻으로 동로마제국의 아나스다시우스 황제에게서한을 보냈다.

이로써 교황은 이후 서구 발전의 기반이 될 이원론二元論을 정식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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