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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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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서구 형성의 개척자로서의 교회 (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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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형성의 개척자로서의 교회

 

로마제국의 비극은 375년경 훈족이 아시아로부터 동 유렵으로 침입해 들어와 동부국경의

주민을 괴롭히고 남쪽과 서쪽으로 전진했을 때 맨먼서 서고오트인들이 제국의 국경선을 넘었다.

동로마제국의 황제 발렌스는 그들을 동맹자로서 맞이하고, 제국 영내에 정주하게 하였다.(376)

그러나 곧 어려운 일이 일어나 교전하게 되었다.

 아드리아노플의 전투에서(378) 발렌스 황제는 서고오트 왕 프리티게론에게 패전하고 살해되었다.

그의 후계자 데오도시우스 대제(379~395)는 다시 한번 어려운 상태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후 곧 서고오트인들은 그들의 왕 알레릭 때, 약탈과 정복을 제계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그리이스로 향하였고 비잔틴을 빠져나와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곧 로마에 이르렀다.

알라릭에 의한 '영원한 도시' 로마의 정복(410)은 전 로마제국을 동요시켰다.

 

아우구스티노는 이 정복에 자극되어 그의 저작 '신국론'을 저술하였고 거기서

그는 이 무서운 대재난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이해시키려 하였다.

 

그때부터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이미 막을 수 없게 되었다. 425년 이래 반달족이 스페인을 황폐화하였고,

429년 북아프리카로 건너가서 이탈리아의 곡창을 정복하였다.

히뽀를 포위하였을 때 포위된 이 도시에서 위대한 주교 아우구스티노가 사망하였다(430)

 

훈족은 다시 행동을 시작, 방화와 약탈을 하며 도나우강을 넘어 갈리아로 전진하였다.

451년 카탈라운 평원에서 그들은 로마 연합군과 서고오트족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들은 452년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죽음의 공포가 반도 전역에 유포되었다.

이번에는 나라를 방어할 수 있는 군사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레오 대교황은 그들을 만투아까지 마중나가 겁에 질린 아틸라 왕을 이탈리아에서 물러가게 하였다.

주민들이 곤궁에서 구출된 것을 대사제 레오를 통하여 하느님이 직접 간섭한 것으로 생각한 것은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2년 후에는 반달족이 아프리카로부터 진격하여 로마 앞에 포진하였다.(455)

 다시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베드로의 후계자로 향하였고 레오 교황은 반달왕 가이세릭과 담판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마 시민들의 생명이 보호되고, 도시가 소진되지 않도록 하는 것 밖에는 더 할 수 없었다.

서로마 제국의 귀족인 게르만족의 기사단장 리케벨은 472년 게르만 용병대를 이끌고

그들을 반격하고 로마를 탈환하였다.

그 사이 게르만 군대는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키고, 스키텐의

영주인 오도아켈을 왕위에 올렸었다. 그때부터 제국의 서부는 모두 게르만 민족의 지배하게 들어갔다.

 

테오데리히 대제는 오도아켈을 죽인 다음, 493~526년 간 이탈리아에 동고오트 왕국을 건설하였다.

돌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527~565)는 고오트에 관한 격렬한 섬멸전 끝에(535~553)

이탈리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568년, 스칸디니비아 출신이고 아직 이교인인 랑고발드인들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여,

거기에 랑고받드 왕국을 건설하였다.(568~774) 로마 및 이탈리아에서의 교회의 처지는 가련하였으니,

랑고발드 족으로부터 압박과 위협을 받고 있었고, 적대적인 아리우스파,

게르만 왕국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으며(418~507년 간의 프랑스 남부의 뚤루즈를 수도로 하는

서고오트 왕국과 스페인의 서고오트 왕국, 아프리카의 429~534년 간의 반달 왕국, 론느 지방의 부르군도 왕국),

비잔틴으로부터 모든 원조가 끊겨져 있었다.

교회는 어디에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까? 교회의 시선은 필연적으로 그가 오로지

로마제국의 연속으로본 동방으로 향하였다.

 

서방의 정치적 난관은 로마인과 게르만인들간의 종교적, 교회적 대립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대되었다.

동방의 친아리우스파 콘스탄시우스 황제 때의 교회적 정치적 정세로 말미암아 半고오트족 불필라(311~382)는

콘스탄티노플에 체재할 때 그리스도교를 아리우스 형식에서 알게되었다.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오 총대주교는, 325년 니체아에서 아리우스의 가장 열렬한 변호자였고,

아리우스와 같이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추방되었었는데, 그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불필라를 '고오트 지방의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아리우스파 주교로 성성하였다(341).

그래서 불필라는 벌써 오래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다시 정통 가톨릭 그리스도교로 귀정해 있었지만

그의 고오트 사람들에게 아리우스설의 그리스도교를 설교하고 있었다.

아리우스설은 고오트인들에게서 시작하여 점점 기타 모든 게르만 부족에게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리우스파의 영방교회領邦敎會가 탄생하였다.

 

Tip: 아리우스(260~336)는 로고스 자체를 완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분리, 로고스(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신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전혀 다르고 영원하지도 않고 전능하지도 않으며 시간적으로 창조되었고,

불완전하고 고통을 격을 수 있다. 그는 모든 피조물 중에서 첫째이고,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 있고,

그래서 그를 半神이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 본질상 신성을 부여할 수 없다는 주장하는 이단.

 

아리우스파는 바로 게르만인의 국교로 간주되었고, 정통 가톨릭 신앙에 대한 뚜렷한 대립에서

게르만인들 자신에 의해 옹호되었다. 종교적 충돌은 모든 게르만 왕국에서 가톨릭 신앙을 가진

현지인들에 대해 적대적인  투쟁자세를 초래하였다.

바로 동고오트 왕 테오데리히 대제(489~526년)는 모든 아리안 게르만 부족들을

가톨릭적 희랍인과 로마인에 대항하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로마 영토에가 아리안·게르만적

大國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인간적인 계산에 의하면 이 기획이 실천에 옮겨졌더라면

서방의 가톨릭 교회를 둘러싸고 그러한 계획들이 추진되었을 것이다.

 

이 계획은 신흥 프랑크 왕 클로비스 때문에 좌절되었으니, 그는 데오드리히 계획에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클로비스는 랭스에서 496년 예수 성탄날 가톨릭 주교 레미지오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신앙으로의 그의 의식적인 귀정으로 데오데리히 계획을 방해하였다.

이 행위는 일류급의 정치가의 행위였고 세계사의 중대한 사건의 하나였다.

이로써 게르만 민족성과 그리스도교·고대문화와의 융합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리스도교적 서구가 탄생할 계기가 마련되었다.

 

가톨릭 교회만이 게르만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동시에 고대의 문화전통과 함께 중개할 수 있었다.

아리우스파는 실제로 종교적 능력도 없었고, 스스로 고대의 문화세계에 뿌리를 박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그것을 중개할 수 없었다. 아리우스파는 이미 오래전부터 고대의 문화세계와 접촉을 끊고 있었으며,

정통적 가톨릭적 지중해 지역에서의 하나의 이질체제로 남아 있었다.

게르만 민족들이 그들의 국가건설에 있어서 고립적으로 머물러 있었던 것은 대체로 아리우스설의 덕분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고대의 제국사상과 문화사상의 보지자保持자로서 계속 그 마력을 발휘하였고,

로마교회는 이 유산을 지속하였다.

 

서 로마제국이 완전히 멸망했을 때, 레오 대교황과 그의 후계자들은 그 지도를 떠맡았었다.

백성들은 전쟁의 혼란과 기근이 있을 때, 교황들은 그들의 유일한 보호자요 부양자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편 교황들은 자신들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고의 정치적 협상을 벌이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훈족과 반달족의 침입시의 레오 대교황의 담판).

그뿐만 아니라 교황들은 교회의 지방 소유지로부터 굶주린 주민들을 위해 곡식과 식량을 조달하였고,

이렇게 옛날 황제의 임무를 지각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가톨릭교 및 국민적, 로마인적 감정이

현지 주민들의 의식 속에 융합되었고, 로마 교회는, 하로나크가 표현한 것처럼 바로 "종교적인 것으로

전위된 서로마제국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주교는 서로마제국의 내밀한 황제였다.

 

이제 이 로마교회는 프랑크인들에게 포교하는 동시에 폭넓은 기반에서 게르만 민족의 교화를 시작하고,

구 세계의 페허 위에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최대의 세계사적 과제가 그에게 부과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자연적인 어떤 연속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최근의 연구에서 드러나는 바와같이, 이 흐름만으로는 장래를 형성할 수 없었을 것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구로마제국의 정치세력이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구문화의 흐름 역시 크게 마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교 및 게르만 민족에 의한 변화가 없었더라면 고대는 장래성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탄생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공적이었으니, 로마 가톨릭 교회는 미래의

주인공이 될 북방 민족들에게 그리스도교와 고대문화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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