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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아일랜드의 그리스도교化 (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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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그리스도교化

 

아일랜드는 10세기까지 大스코틀랜드라 불렸는데( 오늘의 스코틀랜드인 小스코틀랜드와 다름),

로마인들에 의해 정복된 적이 없었다.

이 섬은 이미 400년 이전에 브리타니아로부터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듯하다.

교황 첼레스티노1세는 431년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아일랜드인의 최초의 주교로' 빨라디우스' 부제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아일랜드의 그리스도교는, 이 지방의 본연의 선교사로 불릴 수 있는,

역사적으로 확실히 증명되는 브리타니아 사람 패트릭(385~461)에 이르러서야 상세하게 파악될 수 있다.

 

패트릭은 401년경 아일랜드 출신 해적에 의해 노예로 아일랜드로 끌려갔었다.

407년 브리타니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아일랜드나라와 그 나라 말을 알고 있었다.

그후 그는 수도자가 되기 위해 유명한 南 갈릳아의 수도원에 들어갔고, 다음 옥세르에서 성직자가 되었으며,

 432년 아일랜드 포교에 착수하여 거기서 사망한 빨라디우스를 대신하여 포교주교로서 활동하였다.

그가 461년 사망했을 때, 이 섬은그리스도교화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조직도 되어 있었다.

 

교회생활 전반에 걸쳐 수도생활적 성격은 도시가 없는 이 섬의 전형적인 것이 되었다.

교회조직은 외적으로 많은 수도원과 연결되었고, 이어 온 섬이 수도원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큰 수도원들은 각기 많은 부족의 교회적, 종교적 중심이 되었다.

수도회를 창설한 위대한 성인들은 최고의 존경을 받았고,

주교들 대신 수도원장들이 아일랜드 교회의 책임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수도원장들은 동시에 교회 재치권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다만 주교성성主敎成聖을 위해 한 명의 보좌주교를 두었는데, 이를 위해 대개늕

그들의 수도자 중 한 사람을 주교로 만들었다.

 

수도생활은 6세기에 대단히 유행하였다.

전 민중을 사로잡은 그리스도교적 열광이 미증유의 수도생활의 붐을 초래하였다. 수도원이 많아지고 번영하였다.

수도원들은 정신생활과 신심생활의 고등교육기관이었다. 무수한 성인들과 그곳에서 배출되었다.

사람들은 미구에 이 섬을 '성인들의 섬' '박사들의 섬'으로 부르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이러한 황금시대는 740년경까지 계속되었다.

 

수도생활의 깊은 영향은 자연 교회생활의 형성에도 미쳤다.

부족의 본 수도원은 각기 자기 부족의 영적생활을 돌보았다.

수도자들은 사목활동을 하고, 민중을 위해 학교를 경영하고, 전례를 집전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사제여야 했다. 수사신부는 아일랜드에 있어서 다름 아닌 사목사제였다.

수도자의 관습과 수도생활의 양식이 사제상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특성들은 아이레·스코틀랜드인의 대륙포교와 더불어 흔히 대륙으로도 전파되었다.

 

독신제, 성무일과, 수도원 공동생활의 원리들이 처음에는 다만

아일랜드 수사신부들의 고유한 것이었으나 때가 흐름에 따라 점점

서구의 모든 사제들을 위해서도 의무적인 지도이념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시기에 있어서 수도생활의 금욕적 관습이 아일랜드에서 시작되어

유럽 대륙에까지 사제와 평신도에게 널리 파급되었다.

수도자들의 엄격한 속죄규정과 고행이 그 모범이 되었다.

사목자요 영혼의 지도자로서의 수사신분들은 일찍이 수도원에서 실시되었고,

다른 곳에서도 이미 실시되던 개인적, 비밀적, 자진적 속죄 및 사적 고백을 평신도 세계에 전달하였다.

열광적인 평신도들이 그것을 자극하고 요청하였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대죄가 있을 때 공개적 교회 속죄 밖에 모르던

고대 그리스도교의 속죄제도만으로 평신도들이 만족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에서 수도자에게 실시되었고, 또한 은밀한 마음의 죄에까지 미치던

영신지도는 완덕을 향한 고상한 금욕적 노력에 알맞는 것이었고, 영신문제에 있어서 기꺼이

조언에 응하던 수도자들은 그것을 평신도들에게 권하였다.

 

대죄의 고백은 비록 그것이 비밀리에 진행되었을지라도 고대 그리스도교의 속죄제도에도 들어 있었다.

주교는 참회자에게―원래 그것은 일생에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속죄를 부과하였고, 속죄가 끝난 다음 비로소 그를 다시 교회공동체에 받아였엇다.

이러한 화해와 더불어 최종적인 사죄赦罪가 주어졌다.

은밀한 내적인 죄까지 고백하는 사적고백 새 형식은 사죄를 즉시 해주었다.

그것은 신부 앞에서 '비밀 고백' 방식으로 실시되었고, 언제나 되풀이할 수 있었다.

이제 그것은 영신지도의 수단으로 평신도들로부터도 점점 요구되고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6세기와 7세기에 서구에서 널리 사용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전 서구교회의 신심생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미구에 사람들은 영성체 전에 으례 고백을 하기 위해 몰려 들었다.

보속에 대한 입문서를 고해 신부들에게 주기 위해 가장 먼저 아일랜드에서 속죄규정서들이 나왔는데,

거기에는 죄의 목록과 함께 부록에 속죄규정이 들어 있었다.

이러한 속죄규정서는 7세기 이래 전 서구의 모든 사제가 직무상 지녀야 했으니,

교회의 속죄제도를 올바로 이행하려면 그 책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 내용을 알아야 했다.

 

평신도 세계에 사적고백을 도입시킨 촉복된 성과는 곧 아일랜드에서,

그 전성을 이룬 최고의의 종교윤리생활 전반에서 나타났다. 

아일랜드 교회를 대륙의 교회, 특히 메로빙 왕조의 프랑크 왕국 교회와 비교할때 그 엄청난 차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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