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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앵글로 색슨인의 대륙포교 (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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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글로 색슨인의 대륙포교

 

앵글로 색슨의 수도자들은 아일랜드인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위한 순례로의 억제하기

어려운 충동과 포교열도  넘겨 받았다.

그것은 곧 같은 혈통의 작슨과 프리즌에서 놀라운 활동력으로 전개될 대륙포교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아일랜드인의 사고방식과의 차이가 역력히 드러나게 된다.

 

아이레·스코틀랜드의 선교사들은 비조직적이고 비계획적이었고,

평범한 민중을 상대로 하고 개개의 영혼들을 구하려고 하였다.

반면 앵글로 색슨 선교사들은 그들의 포교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추진시켰다.

그들은 그들의 일에 대해 교황으로부터 재가를 얻고,  프랑크 왕국의 지배자들로부터 지지하게 하였다.

다음 그들은 교황의 파견서한과 왕의 보증서를 갖고 권세가들과 민중의 지도자들인 종족 공작들을 만나,

먼저 그들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민중이 그들을 따를 것임을 선교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권위와 교회조직은 그들의 우선적인 행동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로마의 전통은 중요하다.

'상층에 대한 포교'는 보호의 보장과 조직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 성공이 보증될 때에 비로소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보편적인 교황직과의 결합은 계획의 범위를 넓히고 자주성을 부여하였다. 그

것은 무엇보다도 영방교회領邦敎會로 다시 협소화되는 것을 막아 주었다.

 

앵글로 색슨의 최초의 뛰어난 선교사는 요오크의 주교 빌프리드였다.

그는 678/679년에 프리즌 사람들에게 설교할 권한을 얻었는데,

그것은 그가 '사도들의 元首요 천국의 문지기'인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 대한 존경심에서 로마에 순례할 때였다.

689년에는 그의 두 제자, 에그베르트와 비그베르트가 그의 뒤를 따랐다.

1년 후, 빌리브로드 역시 먼저 로마로가서 재가를 얻은 다음 동료 12명을 동반하고 프리이스란드로 갔다.

프랑크족의 궁정집사 피핀(688~714)은 그에게 하부 슈엘드를 포교지역으로 정해주었다.

제2차 로마 여행 때(695) 그는 다시 포교위임을 받고, 주교품을 받았다.

그는 우르렉히트를 주교좌로 택하고, 697년 포교의 정신적 지주로서 에히테르나크 수도원을 세웠다.

거기서 그는 735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숙련된 지도를 받으며 빈프린트 보나파시오도 포교활동을 시작하였다.

 

빈프린트 보나파시오는 앵글로 색슨계 대륙 선교사 중에서 가장 큰 인물이었고,

유럽의 그리스도교적 국제사회를 개척한, 서구의 뛰어난 중요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중요성은 독일에 포교한 사실보다는 ― '독일의 사도'란 존칭은 16세기에 가서야 주어졌다 ―

오히려 그가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조직한 점에 있고, 그 결과 침체한 프랑크 영방교회를

보편교회의 사상으로 귀의하게 하고, 이 교회들을 그들의 고립에서 해방시키고,

보편교회의 중심인 로마와 결합시킨데 있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크 왕국과 교황직간의 동맹을 준비하고 그 발전을 가능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카알 대제에 의해 계속되어, 800년의 황제 대관식 및 962년의 오토 대제에 의한

서구제국의 복구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보나파시오가 아니었더라면 중세의 보편적 제국사상은 생각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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