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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마호메트 (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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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메트

 

개요

역사상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영향은 다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이슬람교는 세계의 약 5억 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믿는 산 신앙이기 때문에 그 종교적 영향력을 들 수 있다.

둘째, 그가 시작한 운동은 20년이 채 못 되어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를 뒤흔들고

        새로운 문명을 수립했으므로 역사적 영향력이 컸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사회조직체계이기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했다.

그밖에는 생애의 여러 면에 대한 마호메트의 행동기록(하디스)은 신자가 준수해야 할 규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인격이 후세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과 사물에 대한 견해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도 중요하다.

여러 가지 기적 이야기를 엮어서 마호메트의 생애를 이상화하려는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다.

한편 19세기 이후의 이슬람의 근대주의자나 개혁주의자는, 이슬람의 형이상학적·율법주의적 측면을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그의 인간상을 두드러지게 개성화하고,

정통파가 용인할 수 없는 신학상의 지위를 그에게 부여했다.

예를 들면 마호메트를 〈코란〉의 저자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기본적인 교리에 따르면 〈코란〉은 신의 계시이고,

그는 신의 계시를 인류에게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며 결코 초자연적인 자질이 부여되지는 않았다.

정통파의 이슬람교도에게 있어서 그를 〈코란〉의 저자로 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다.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마호메트교(Mohammedanism)라는 말을 이슬람교도가 거부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이슬람교도는 그의 사후 얼마 안 가서 대개 이상화된 형식이긴 했지만 그의 전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전통적인 마호메트 전기들 중에서 주요한 것은 이븐 히샴의 〈신의 사도의 전기〉이지만,

와퀴디의 〈원정(遠征)의 서(書)〉와 이븐 사드의 〈대계급서〉도 중요하다.

이것들은 모두 8~9세기에 저술되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역사자료는,

그가 신의 계시를 받아 한 말을 기록한 〈코란〉 바로 그것이다.

〈코란〉의 편집은 그의 생전에 시작되어 이미 659년경에는 현행의 전문(全文)이 확정되었고,

그후 조금도 변경된 적은 없다. 전술한 하디스는 대대로 구전된 그의 언행을 전승학자가 수집하여 기록한 것인데,

후세에 위작된 것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코란〉에 비해 신뢰도가 낮다.

6가지 하디스집 중에 특히 존중되는 것은 9세기에 편집된 부하리와 무슬림의 하디스집이다.


청장년기

마호메트는 메카에 사는 쿠라이시 부족의 하심가(家)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아브드 알라는 그가 출생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났고, 6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때 하심가는 기울기 시작했고, 고아 마호메트는 처음에 조부 아브드 알 무탈리브,

그의 사후에는 숙부 아부 탈리브에게 양육되었다.

그는 또 잠시 동안 메카 근교 유목민 부인에게 양자로 보내져 목동으로 소년시절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장성했을 때, 그는 메카 상인이 파견하는 대상에 가담해 북방의 시리아와 남방의 예멘으로 여행했는데,

아마 그 첫 여행은 숙부 아부 탈리브가 거느리는 시리아로 가는 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유한 미망인 하디자가 마호메트에게 대상을 맡긴 것은 그가 대상 일에 수완이 있고 정직하다는 평판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는 25세 때 하디자와 결혼했고, 이 결혼은 하디자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으며 매우 행복한 생활이었다고 한다.

그당시 하디자는 40세였다고 전해지나 마호메트가 가장 신뢰하는 반려자였으며,

그의 가르침을 믿고 이슬람교도가 된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처럼 마호메트는 선교를 시작한 40세경까지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질 수도 있었다.

사람이 빨리 늙어버리는 아라비아의 풍토 속에서 이미 그는 모험과 야심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돌연히 상황이 일변해 그의 생애에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선교의 시작

마호메트는 610년경, 1년 중 일정 기간 동안 메카 교외 산중에 틀어박혀 명상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는 습관이 있었다

(→ 색인:종교체험). 그는 그해의 어느 날 밤, 히라 산에서 짓눌리는 듯한 영적 체험을 했다.

곧 대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신의 말씀이 그에게 계시된 것이었다.

마호메트 자신이 후에 말하기를, 엄숙한 음성이 울리면서 빛나는 무엇인가가

그의 목을 붙잡고 계시된 신의 말씀을 복창하라고 명령했다.

처음에 그는 도망치려고 했다. 이윽고 계시가 끝나자마자 마음 깊은 곳에서 공허감이 그를 엄습했다.

결국 그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전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다고 확신하고 613년경부터 전도를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유일신의 전능을 열렬하게 그리고 되풀이하여 선언하는 것이었는데,

이 유일신은 우주의 창조자이며, 부활의 날에 그 피조물의 모든 것을 최후의 심판을 위해서 불러모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정의의 신은 동시에 자비의 신이기도 했다. 신은 지상을 자신의 영광과 은혜의 징표로 채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관해, 신에 대해서 도의적 책임을 진다.

모든 사람은 신앙(ῑmān)·예배(ṣalāh)·희사(zakāt)로 신의 자애와 가호에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이것을 새로운 교리로서 제창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이 예언자의 전통적 흐름을 따른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 이전에 아브라함·모세·예수 등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예언자들이 같은 사명을 띠고

인류에게 보내졌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예언자들의 '주의' 및 '경고'(이것들은 〈코란〉 용어임)는 신의 계시가

아랍어로 마호메트에게 내려졌으므로, 이제는 아랍어로 아랍인들에게 반복된 것이다.


메카 시민의 반응

메카에서 즉각적인 반대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초기의 수년 간은 가족과 친구 등 소수의 친한 동료에게만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그가 대중을 상대로 전도를 시작하자 메카 시민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것은 경제적 문제 때문인 듯하다.

왜냐하면 이슬람교가 사막의 유목민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도시,

특히 상업과 금융업에 대한 탐욕적인 관심이 특징인 메카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각처로부터 순례자들이 모이는 카바 신전은 메카에 이익을 가져왔고,

순례달에는 상설시장이나 정기시장도 번창했다.

메카에서는 이렇게 상인공화국, 즉 가장 부유한 상인들로 이룩된 평의회가 지배하는 과두정치가 성장하고 있었다.

마호메트의 가르침은 이러한 메카의 금권 과두정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는 처음에는 조소와 끝없는 논쟁에 그쳤다.

그러나 곧 박해가 시작되고, 615년에는 그 박해가 심해져 그는 씨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신자를

그리스도교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피난시켰다.

'애도(哀悼)의 해'라고 불린 619년 마호메트는 애처 하디자와 숙부 아부 탈리브를 잃었다.

메카 이외에서 피난처를 찾던 그에게 야스리브라는 도시가 원조의 손길을 내밀었다.

야스리브는 마호메트에게 융숭한 대접을 베풀었기 때문에 후에

'예언자의 도시'(madinat an-nabiy)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 현재의 메디나(마디나의 전와)가 그곳이다.


메디나 시절

메디나는 메카와 달리 광활한 오아시스에 위치해, 주민은 대추야자 재배를 업으로 하는 농민이었다.

이곳에는 서로 패권을 다투고 적대하는 아우스와 하즈라지 2개의 아랍 부족과 3개의 유대교도 부족이 살고 있었다.

 아우스와 하즈라지의 대립은 해결방안이 없는 처지가 되었고, 그 대립은 이제 쌍방 모두와

아무 관계가 없는 제3자의 조정이 아니고서는 해소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점에서 부족이라는 인간의 혈연적인 결속을 부정하는 이슬람교의 교주 마호메트는 지극히 적절한 조정자였다.

한편 그로서도 상당한 수의 유대교도가 사는 메디나는 같은 일신교인 이슬람의 신자 획득에 안성맞춤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메디나의 아랍인과 마호메트 사이에 은밀한 교섭이 진행되고, 그결과 622년 아카바의 맹약이 체결되어

메디나의 아랍인은 마호메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곧 메카의 이슬람교도는 삼삼오오 떼를 지어 메디나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사태의 심각함에 놀란 메카의 대상인들은 그를 암살하려고 했으나, 그는 교묘하게 난을 피해

그해 9월 24일 무사히 메디나에 도착했다.

이것이 헤지라(성천[聖遷]: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이주')이며, 이슬람교도는

서기 622년 7월 16일을 이슬람력(曆)의 시발점으로 삼았다.

종교인 동시에 사회조직의 원리이기도 한 이슬람교는 이해에 그 틀이 잡혔던 것이다.

헤지라는 또한 마호메트의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다.

메카의 전도자는 이제 메디나에서 정치가·지배자·군사령관이 되었다.

이슬람 최초의 국가구성법이라 할 메디나 헌장은 헤지라 후 얼마 안 가서 제정되었다.

 메디나의 아랍인들 중에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안사르(anṣār:원조자)라고 한다.

메디나의 주민과 메카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을 통합하는 마호메트의 최초의 수단은 이주자와

안사르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의형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대교도를 자기편으로 삼기 위해 그들에게 유대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예배 때 예루살렘을 향하는 것을 비롯해 그들의 종교의식의 일부를 이슬람교에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교도는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해 양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헤지라 후 2년이 못 되어서 예배 때 향하는 방향(qῑbla)은 예루살렘에서 메카의 카바 신전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이슬람교는 메카에 카바 신전을 건립한 아브라함의 일신교 부활이며,

따라서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보다 훨씬 오래된 일신교라는 교의가 확립되었다.


군사원정

카바 신전이 자리잡은 메카는 이슬람교의 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메카 정복을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맨몸으로 메카를 탈출한 이주자들의 생활은 고달팠다.

그는 메카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전리품 획득으로 이주자의 수입을 도모하기 위해 메카 대상(隊商) 습격에 나서,

624년 봄 바드르에서 최초의 대승리를 거두었다 (→ 색인:바드르 전투).

1년 후 바드르의 복수를 다짐하는 3,000명의 메카군이 메디나로 밀려와 이슬람교도는 패배를 맛보았고

마호메트도 부상을 입었다. 627년 봄 이권으로 유인한 유목민을 포함한 메카의 1만 대군이 메디나를 향했으나,

 마호메트가 미리 파놓은 도랑 앞에 속수무책으로 3주간 포위당한 끝에 뿔뿔이 흩어져 메디나를 떠났다.

마호메트는 이 도랑 전투의 결과 주도권을 회복하자 이것을 협상 수단으로 이용했다.

메카와 메디나의 군사력은 이제 백중했고 메카인은 자신들의 통상을 파괴하는 싸움에 지쳐버렸다.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아랍인의 카바 순례를 존중할 뿐만 아니라 마호메트가

그것을 이슬람교의 중요한 의식으로 삼는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도 그들의 적개심을 잃게 만들었다.

 메카와 메디나의 통상 재개를 포함한 여러 가지 절충 끝에 마호메트는 제자들을 인솔해 카바 순례를 하기 위한

휴전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메카에 접근하자 무장한 기사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후다이비야에 야영하면서 메카의 대표와 교섭을 가졌고 마호메트는 다음 3가지에 동의했다.

첫째, 이슬람교도는 그해의 순례는 단념하지만 이듬해 3일간의 기간을 정해 다시 순례할 것,

둘째, 마호메트를 흠모해 보호자의 허가 없이 메디나에 찾아온 메카 사람은 보호자가 요구하는 즉시 메카로 돌려보낼 것,

셋째, 앞으로 10년간 휴전하며 그동안 메카인과 메디나인은 자유로이 상대방의 영토를 통행하고,

만일 어느 쪽이든 다른 제3자와 싸울 경우에 서로가 중립을 지킬 것 등이었다.

이것을 ' 후다이비야 조약'이라 한다. 이슬람교도의 대다수는 마호메트가 지나치게 양보했다고 하여

이 조약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아라비아 반도 제일의 권세를 자랑하는 메카 시민과 쫓기듯이 고향을 버린 메디나의

이슬람교도는 이제 대등한 입장에 섰고, 마호메트는 전투를 피하면서 완전히 메디나를 장악할 시간적 여유를 얻게 되었다.

이듬해인 629년 이슬람교도가 전년도 조약에 따라 카바 순례를 행하자 메카 시민은

근교 산지로 물러갔고 도시는 텅 비었다. 이슬람교도는 순례를 마치자 후다이비야 조약에 정해진 대로

3일 후에 메디나로 돌아갔다. 마호메트가 무력과 온건함을 겸비한 것을 본 메카인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메카와 메디나와의 긴 전쟁을 해결할 시기가 무르익어갔다. 2곳의 유목 부족이 싸움을 시작해

메카가 어리석게도 중립조항을 어기고 한쪽 편을 들었을 때, 메카와 메디나 싸움에 종지부를 찍는 호기가 찾아왔다.

630년 1월 그는 즉시 메카 진격명령을 내렸다. 메카는 사실상 무저항으로 항복하고 거의

모든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렇게 해서 과거 수년 간의 협상을 통한 그의 인내,

감수했던 부담, 제자들에게 부과한 억제는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그의 온건함은 메카 정복 때에도 잘 나타났다.

그는 위용을 갖추고 카바에 진입해 모든 우상을 파괴할 것과 다신교의 신전인 카바를

이슬람교의 최고 신전으로 삼을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징적 행위 외에는 주민의 감정을 상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사실 그는 은사(恩赦) 등의 관대한 정책을 통해서 이전에 적이었던 메카 주민에게서 영원한 협력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유대교·그리스도교와의 관계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제창되고, 메카를 신앙의 중심으로 하는 이슬람교는 점차

유대교·그리스도교와는 다른 종교라는 것을 명백히 했다.

확실히 마호메트의 설교는 처음에는 일신교 신앙의 본질적인 동일성을 늘 강조했다.

이런 사실은 예컨대, "신은 노아에게 알리신 것과 같은 종교를 그대들에게 정하시고,

아브라함·모세·예수에게 알리신 것과 같은 종교를 그대들에게 계시하셨다"고 한 것처럼,

〈코란〉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또 이슬람교도는 계전(啓典)의 백성(곧 유대교도)과 다투지 말고 다만

 "우리는 우리에게 계시된 것을 믿고, 그대들은 그대들에게 계시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의 신과 그대들의 신은 같으며, 우리는 이 신을 믿고 의지합니다"라고 말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메디나 시대 초기부터 율법을 모세의 이름에 대한 온갖 호소에도 불구하고

유대교도는 이슬람교도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오히려 메카인에게 가담했다.

그러나 3개 부족의 유대교도는 일치단결해 마호메트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각기 고립된 움직임을 보여,

2개 부족은 메디나에서 추방되고 나머지 1개 부족은 멸망했다.

마호메트는 후다이비야 조약을 맺은 뒤 유대교도가 사는 중요한 오아시스 취락인 카이바르를 정복해(628)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교도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

유대교도와의 관계에 비하면 그리스도교도와의 관계는 대체로 양호했다.

"신자(이슬람교도)에 대해 가장 친밀한 애정을 가진 자는 '우리는 그리스도교도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사제나 수도사가 있어 오만한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코란〉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퍼지고 그리스도교도 집단과 접촉이 잦아지자 양자 교리의 기본적인 차이가

분명해져 불화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631년 예멘 나지란의 그리스도교도 사절과의 종교 문답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교리를 둘러싸고 결렬된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나 마호메트는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모스크(이슬람교 성원)의 일부를

그리스도교도를 위해 개방해 그들이 거기에서 의식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만년

630~631년 아라비아 반도 각처에 사는 여러 부족의 사절이 메디나의 마호메트를 방문했지만,

동시에 군사원정도 행해져서 이슬람 국가는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때 마호메트의 권위는 견고하게 확립되어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은 점차 진척되었다.

그는 행정조직을 개편해 그때까지 자발적이었던 희사(喜捨)는 정부에 바치는 일정비율의 세금이 되었고,

혈연에 의한 인간의 결합은 종교에 의한 결속으로 대체되었으며 다신교는 영구히 금지되었다.

이슬람교도 사회는 평등원칙에 따라 오직 〈코란〉의 율법에 의해서만 지배되었다.

이 시기의 〈코란〉 구절들은 주로 법률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부인에게 재산의 소유와 상속의 권리를 인정해주었고 남편의 의무가

처음으로 명확해졌으며 동시에 취할 수 있는 아내의 수는 4명까지로 제한되었다.

이 규정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십수 명의 아내를 가졌는데,

이 일은 종종 유럽 비평가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아내 하디자의 생전에는 결코 다른 아내를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하디자 사이에 딸 4명을 두었는데, 그중 하나인 파티마는 마호메트의 사촌동생 알리와 결혼했다.

알리와 파티마 사이에 하산과 후사인이 태어났다.

만일 마호메트의 지위 계승이 혈통에 따라서 결정되었다면, 이 2명이 이어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선거제가 채택되자, 상속을 둘러싼 싸움이 이슬람 역사상 최초이자 또한 최대의 분열을 야기한 것이다(→ 칼리프 ).

마호메트는 631년의 순례 때 가장 오랜 제자 아부 바크르에게 지휘를 맡겼으나,

'이별의 순례'라고 일컫는 이듬해 632년의 순례에서는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그는 그때 곧 자신의 생명을 앗아갈 병이 상당히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따라서 마호메트 자신에게나 그의 제자들에게 이별의 순례는 예언자 생애의 총괄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는 최후의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그의 사후에도 분열하지 않도록 당부했고,

신은 유일하며 신자는 형제라는 것을 재차 확인했으며, 여성의 권리에 유의할 것을 신도들에게 명했고,

피의 복수와 이식(利息)의 폐지를 선언했다.

그는 메디나로 돌아와 632년 6월 8일 죽었다.

전승에 따르면 새로 선출된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는 비탄에 빠진 신자들에게

"만일 그대들이 마호메트를 숭배하고 있다면 분명히 마호메트는 죽었다.

그러나 만일 신을 숭배하고 있다면 신은 지금도 살아 있다.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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