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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프랑크 왕국과 교황령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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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과 교황령

 

랑고발드족이 그레고리오 대교황에 의하여 그리스도교로 개종되었다 할지라도, 정치적 긴장은 남아 있었다.

랑고발드족의 리우드프란드 왕(712~744)이 마침내 정복정책을 다시 채택하고,

전 이탈리아를 굴복시키려고 한 바로 그때에 동로마제국은 대내외적인 큰 위기로 인해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교황들은 도움을 요청해서나 소용이 없었다. 비잔틴은 교황들에게 군대를 보낼 수가 없었다.

랑고발드와 투쟁이 와중에서 비잔틴 황제로부터 버림받게 된 그레고리오 3세 교황(731~741)은

프랑크 왕국의 궁정집사 카알 마르텔에게 도움을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카알 마르텔은, 남불南佛에서의 아라비아인을 대항하기 위해 

랑고발드족의 지지가 필요하였기에 교황의 도움을 거절하였다.

자카리아 교황(741~752)은 랑고발드의 왕 리우프란드와 20년간의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잠시 평온해서나 아이스툴프(749~756)가 이전 정복계획을 다시 채택했다.

로마의 이 새로운 위협은 교황 스테파노 2세(752~757)가 다시 한번 프랑크 왕국의 원조를 청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간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하여 카알 마르텔의 아들인 동시에 후계자인 피핀은

교황의 말에 완전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서는 벌써 오래 전부터 메르빙 왕가의 유명무실한 왕들을 대신하여 궁정집사들이 통치를 하고 있었다.

궁정집사 카알 마르텔은 732년 뚜르와 뽀와티에에서 아라비아인들을 격파하였고

그래서 그의 궁정집사직을 전 프랑크 왕국에서 이의없는 통치자로 만들수 있었다.

실제로 카알 마르텔은 유럽을 이슬람으로부터 구출하였고, 711년 지브랄타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 침입,

서고오트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미 프랑스 남부를 정복했던 마호메트의 광신자들의

개선행렬을 결정적으로 저지한 '해머'였다. 아직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서구의 왕이었다.

 

그의 아들들, 카알만(741~747)과 피핀(741~768)도 독자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카알만이 정치를 단념하고 문테카시노의 수도자가 되었을 때(747), 실재로 독재군주가 된 피핀에게,

또한 궁정집사권이 갖지 못하는 왕족권을 종교적 도유로써 보충할 보다 높은 권위가 필요하였다.

그때의 상황에서 오직 교황만이 그것을 할 수 있었으니, 보니파시오 때부터 교황의 명망과 세력이

다시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핀은 자카리아 교황(741~752)에게 이 거보를 감히 내디딜 수 있는가의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하였다.

교황의 동의를 얻어내고 따라서 최고의 영적 권위의 보증을 얻게 된 피핀은 소아쏭의 의회(751~752)에 나타나,

자신을 프랑크 왕으로 선출하게 하였다.

이어 교황은 한 프랑크인 수도 대주교에게 피핀에게 신성한 품위를 부여하는 도유를 하도록 위임하였다.

 

보니파시오의 개혁으로 시작되고 피핀에 의해 계속된

프랑크 왕국의 새로운 로마 지향은 이때 시작된 교황권의 프랑크 왕국으로의 전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비잔틴 사람들과 랑고발드 사람들이 교황으로 하여금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것은 참된 '유럽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을 의미하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긴장관계에도 불구하고 시종 비잔틴을 지향해 온

교황권이 비잔틴을 떠나 완전히 서구로 전향하였다.

그런데 서구의 대표자는 프랑크 왕국이었다.

 

753년 여름 랑고발드 왕 아이스툴프가 다시 로마를 위협하였다.

이번에도 비잔틴으로부터 아무런 원조를 기대할 수 없게 되자 교황 스테파노는 프랑크 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황은 자신을 프랑크 왕국으로 초대하고 맞을 것을 프랑코 왕에게 간청하였다.

피핀은 즉시 이 요처을 받아 들였다. 그것은 그를 위한  교황에 대한 깊은 감사의 의무를 치를

기회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가 종교적, 윤리적 임무와 결부된 것으로 자부하던,

새로 얻은 그의 그리스도교적 왕권을 위해, 교회의 수호를 위한 정치적, 군사적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753년 11월에 시작된 교황의 프랑크 왕국으로의 여행은 '비잔티·로마제국으로부터의

교황직의 이탈, 교황사에 있어서 동로마제국 시대로부터 프랑크 민족시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것이다.

' 754년 1월 7일 폰티온에서 교황직과 프랑크 왕국간의 우호관계가 성립되었다.

피핀은 교황에게 랑고빌드왕에 대항하여 원조할 것과 동시에 그깨짜기 랑고발드족으로부터 정복한 지역,

특히 라벤나를 '반환'할 것을 약속하였다.

 

754년 4월 프랑코 의회는 랑고발드 족에 대해 교황을 수호할 것을 결의하였다.

피핀은 유명한 증여증서에서 적으로부터 빼앗은 모든

중부 이탈리아 영토를 증여할 것을 스테파노 2세에게 약속하였다.

그것은 루스치아, 라벤나, 베네치아, 이스트리아, 스폴렌트와 베네벤토의  공작령이었다.

이 지역들을 성 베드로에게 기증함으로써 피핀은 이후 '교황령'이 탄생할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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