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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카알 대제와 서구의 세계국가 건설 ( 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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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 대제와 서구의 세계국가 건설

 

카알은 754년 이미 12세의 소년으로 그의 아버지 피핀과 교황 스테파노 2세가

폰티온에서 회합할 때 같이 참여하였고, 조약에 같이 서명하였으며 교회의 도유를 받았다.

768년 우선은 그의 형 카알만과 같이 통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형의 조사早死로 독재 군주가 되었고, 그후 출정의 성공으로

그의 왕국을 거의 전 유럽에 확장시키고, 대내외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비록 그가 화해정책의 정신에서 그의 어머니 베르트라도의 권유를 따라 의식적으로

랑고발드왕 데시데리우스의 딸 데시데리아와 결혼했었을지라도 프랑크 족과

랑고발드족간의 긴장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카알이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마침내 데시데리아를 쫒아 내고,

그녀를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 보냈을 때 전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데시레리우스는 카알을 반대하는 동맹을 체결하고자 하드리아노 교황(772~795)을 설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교황이 거절하자 그는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전진하였다.

그러나 하드리아노 교황은 카알의 원조를 청하였고, 카알은 곧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나타나서 랑고발드 왕국을 정복하였다(773/774).

 

카알은 774년 부활절에 로마를 방문하였고, 그때 교황과 프랑코 왕 카알은 성 베드로의 무덤에서

서로 영원히 충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카알은 '로마 최고의 귀족'으로써 로마를 보호할 군사적 임무를 떠맡았다.

이후 '로마교회의 수호'는 프랑크 왕국의 가장 고귀한 사명이 되었다.

이 보호 직무는 곧 카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서구 제권帝權 자체의 직무가 되었다.

더불어 카알은 그의 아버지 피핀의 증여 약속을 교황에게 다시 하였다.

그러나그간 데시데리우스에게 승리를 거둔 후 스스로 랑고발드 왕이 되었고,

이탈리아에서의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증여를 미루다가,

781년 비로소 그는 라벤나의 태수령, 오시부 지방(五市府地方), 남부 투시치아와 사비나,

그밖에 몇개의 작은 지역을 독립된 통치지역으로 교황에게 인정해 주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교황령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1870년까지 존속되었다.

 

교황권 및 로마교회와의 동맹으로 교회적, 종교적 지위가 확고해졌으므로 카알은

그의 정복작전을 더욱 강력하게, 동시에 또한 종교와 교회의 이름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인 기도는 오로지 제국의 국경주변을 위협하는 이교도와 미신자들의 대상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출정은 이제 스페인의 회교도와의 싸움이건, 이교도인 그의 제국의

동부와 서부의 작선족,아바아르족, 슬라브족, 보헤미아인과의 싸움이건 모두 군사적, 정치적 못지않게

교회적, 종교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한 이 민족들의 그리스도교화는 동시에

프랑크 왕국의 주권에 대한 굴복을 의미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리스도교는 작선에서 놀라운 속도로 그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수도원들이 번영하였다. 9세기 중엽 그곳의 작자미상의 한 시인이 훌륭한 '구세주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은 마치 구세사가ㅏ 작선지방에서 전개되었고, 작선족으로부터 복종의 충성을 맹세받은

그리스도가 작선의 공작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구세사를 묘사하였다.

이 작선 민족은 10세기에 오토 왕조의 황제가문에서 벌써 깊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현저하게 드러냈고,

중세를 형성한 그리스도교적 독일 제국사상을 지닌 사람들을 배출하였다.

작선이 프랑크 왕국에 편입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세계제국은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할 수 있다.

 

카알을 그의 왕권의 지도적 과제를 완전히 그리스도교적 정신에서 이해하였다.

아우구스띠노의 神國의 실현이 그에게 이상적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 책을 그의 식탁에서 낭독하게 했었다.

그는 큰 사랑과 세심을 갖고 그의 백성의 종교적, 교회적, 문화적 향사에 전심하였다.

그의 백성을 굳게 결합시키고, 그는 우선 그들을 가르치고 교육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구에 유럽 전역에 미친 그의 거대한 왕국에서 그는 정치생활만이 아니라 정신생활까지도 일일이 조종하였다.

 

제국의 중심은 이제 센느강에서 라인강으로 옮겨졌다.

786년 카알은 아아헌 궁성의 건축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790년대부터 그가 즐겨 체류하는 고장이 되었고, 또한 수도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그의 궁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집합소가 되었는데, 그들은 법을 구하고,

도움을 청하며, 아니면 정신적 교양까지 갈망하며 그리고 모여들었다.

카알은 정신적으로 수준이 높은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일 줄을 알았다.

아아헌 궁정의 아카데미는 곧 전 프랑크 왕국을 위한 최고의 정신적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아아헌에 체류하는 수많은 궁정관리와 제국관리들 중에는 성직자도 많았다.

789년부터는 교회회의도 자주 거기서 개최되었다.

 

아아헌의 궁정 성당은 795년 비잔틴 양식을 따라 '황제적' 원형 건축으로 되었고,

그리스도교의 서구적 제국이념과 황제 이념의 상징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오토 대제는 아아헌 대성당의 존귀한 카알의 제좌帝座에서 936년 즉위하였다.

 아아헌 대성당의 보물실은 카롤링거 왕들의 유골보관소이고 또한 오토 왕조 때부터는 제국 보물의 보관소로서,

오늘날에도 서양에서 가장 풍부한 보물실의 하나이다

(로타르의 십자가, 복음서 봉독집, 금제 성작덮개,  금제 독서대 등등).

 

궁정학교 외에, 카알의 장려와 보호로 유명한 수도원 미 대성당 소속 학교에서도 학문과 예술이 번성하였다.

교육은 대부분 고대의 교양재敎養財를 갖고 실시되었다.

신생 프랑크 민족은 고유하고 독창적인 사고방식과 예술양식을 찾아내기 위해

우선 고대를 모범으로 삼아 정신적으로 성장해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는 대부분의 고전이 보존된 것은 카알과 그의 학자들이

고대의 저술들을 도처에서 수집하고, 보관하고, 수집한 덕분이다.

이 문헌들을 필사하기 위해 이른바 '카를링거 왕조의 소문자로 불리는 더욱 아름다운 새 서체가 연구되었다.

 

카알은 보니파시오에 의해 시작된 교회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를 추진함에 있어서 그는 점점 교회의 외적인 분야만이 아니라 내적 분야의 지도까지도 자기 권리로 요구하였다.

그는 교회생활의 쇄신을 위해 국법을 반포하고, 제국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그의 왕사王使로 하여금 국가생활만이 아니라 교회생활까지도 계속 감시하게 하였다.

비록 그가 당연히 보니파시오적 개혁의 완성자로 불릴 수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돋 보니파시오적 이념에 완전히 부합될 수 없는,

개인적인 지배 이념으로 각인된 모습을 이 개혁작업에 부연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카알의 지도자상은 신정주의적(神政主議的)인 것이었다.

구약의 관념이 그의 사고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측근자들에게 즐겨 자신을 다윗왕으로 부르게 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고, 불림을 받은 지도자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교계의 보호자로서

그 직무를 행사하였다. 이미 794년 프랑크푸르트의 교회회의에서 그는 자신을 '왕이요 사제'로 부르게 하였고,

796년 교황 레오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왕권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우리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를 어디에서나 밖으로는,

무력으로써 이교도의 진격과 불신자들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고 안으로는,

가톨릭 신앙의 공인을 통해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너희의 임무는 모세처럼 하느님에게 손을 들어올리고 우리의 전쟁수행을 뒷받침함으로써

그리스도교 백성이 너희의 청원으로 어디에서나 그의 원수에게 승리를 거두게 하는 것이다."

 

카알의 관념에서 세속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별이 점점 사라졌고

그가 비잔틴의 황제 이념을 안 때부터는 더욱 그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바실레우스가 그리스도교의 정통신앙의 보호자로 자부하고,

그래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회의 교리와 규율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한 것처럼, 카알도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는 자신을 프랑크 교회의 우두머리로 간주하였고, 왕의 재산과 마찬가지로

교회재산을 마음대로 처리하였으며 교구와 수도회를 자기가 선발한 사람들로 하여금 점유하게 하였다.

그는 주교들과 수도회원장들을 뽑아 성직자 '권세가'로 만듦으로써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국가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미구에 첫째로 목자와 사목자가 아니라 성직자 국가관리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국가의 지시를 받는데 익숙하여졌고, 그들의 성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즐겨 국가 권력에 의지하였다.

 

카알은 800년경까지 '유럽의 지배자'로서 그는 서구의 정치적 통일을 이룩했었다.

그의 거대한 왕국은 가히 아라비아인의 대국(이슬람제국) 및 비잔틴 제국과 어깨를 겨눌 수 있었다.

그것은 지중해 서구세계의 제3의 강국이었다. 그는 이슬람 제국의 칼리프와는 관계를 유지하였고,

동로마제국과는 우열을 다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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