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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성화상 논쟁(聖畵像論爭) (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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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상 논쟁(聖畵像論爭)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우상숭배에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神의 영성을 뚜렷이 제시하기 위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명령이 주어졌었다.

"너희는 어떤 것이든지 조각된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출애 20,4ㄹ; 레위 26,1; 신명 4,6).

그러나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취한 이후

신약에서는 성화상 금지가 구약에서처럼 같은 의의를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시교회는 오래동안 자제하였다.

원시교회는 그리스도를 화상畵像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장 오랜 십자가 표현은 4세기의 것이다(로마의 사비나 십자가).  

비록글을 모르는 많은 신자들을 위해서 성서의 장면과 성인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화상의 정신과 의의에 대하여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그리스도론 논쟁이 이에 관여했고, 그리스도 인성을 묘사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하며 허용되는 것인지가 문제시되었다.

엄격한 모노피지스파(그리스도 單性說),와 마찬가지로 도체투스파(그리스도 假現說)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참된 인성을 믿지 않았으므로 그리스도의 표현을 거부하였다.

온건파들도, 그것이 구원계획면에서 도무지 중요시될 수 없으므로 인성을 묘사하는 것을 적어도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神人을 묘사하려면 그 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神性을 畵像으로 표현할 수 없었으므로, 다만 인성만의 표현은 모두 하나의 위험스러운 이단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네스토리우스파들은 비록 아리우스파와같이 완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에 반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화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모두 이단의 협의를 받을 수 있고, 위험한 것이라고 논증하였다.

게다가 민중들은 모든 화상, 성인들과 마리아의 화상을 미신적으로 공경하는 경향이었다.

그러므로 성화상 및 성화상 공경을 아예 금지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아라비아인이 시리아와 에집트를 침략하고 나서 그들의 反 화상적인 종교적 신전으로 인해

또한 많은 주교들이 그리스도교 민중에게 널리 보급되고, 환영받던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92년 콘스탄티노플의 제2차 트롤라눔 교회회의는 그리스도의 구상적 표현을 찬성하였다.

그러나 성화상을 반대하는 운동이 만연되었고, 마침내 황제 레오 3세가(717~741) 

730년 성화상 공경의 금지령을 전 제국에 반포하였을 때,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민중의 의견도 갈라졌다. 대다수는 수도자들의 지도로 성화상의 보존을 열렬히 변호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3세(731~741)가 로마의 한 교회회의에서 황제의 조치를 반대하였을 때,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성화상 논쟁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741~755) 때 그 절정에 도달했다. 

히에레이아의 한 교회회의는 754년 종교적 내용의 성화상을 모두 없앨 것을 명하였다.

피비린내 나는 폭동, 박해, 처형, 특히 수도자들의 처형이 ―그들은 많은 지방에서 거의 전멸되었다

 ― 동로마제국을 뒤흔들었고, 마침내 여황제 이레네가 양보하고, 787년 제7차 공의회,

즉 제2차 니체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성화상 공경을 다시 허용하였다.

2명의 교황 사절의 출석과 교황의 인정으로 이 공의회는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간의 마지막 공의회가 되었다.

 

공의회는 흠숭과 공경을 구별함으로써 논쟁을 해명하였다.

흠숭은 오직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것이고, 공경은 창조물에게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공의회는 요한 다미세노(754년경)와 大바실리오(379)에 의거하여,

화상의 명예는 本體의 명예로 돌아가는 것이다"고 설명하였다. 

성화상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르키는 성인들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 자체에 있는 것이다.

 "성화상을 공경하는 사람은 그것이 표현하는 인물을 공경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의 여황제 이레네의 주도로 허용된 성화상 문제는 프랑크 왕국의 카알은 반대하였다.

이는 카알의 反 비잔틴 감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간 카알은 동로마제국의 황제 직위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 왔었다.

마침내 교황 레오 3세(795~816)는 800년 성탄축일에 직접 카알에게 대관하고,

로마인들의 열광적인 동의하에 그를 황제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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