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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로마교회의 암흑의 세기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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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교회의 암흑의 세기

 

카알의 아들이며 그의 후계자인 루드비히(814~840)는 방금 이룩된 제국의 통일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결여 되어 있었다.

치세 초기에는  참사회원제도, 수도회법, 성직자법을 반포하며 아버지 카알의 개혁안을 수행하여

'카롤링거 왕조의 절대적인 정점'으로까지 평가 받았다.

 

루드비히는 그의 아내 이르민가르드(818)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었고, 벌써 817년에 그들에게 제국을 나누어 주었다.

맏이 로타르는 황제지위와 주권 외에도 이탈리아에서부터 대서양에 이르는 제국의 중앙부분을 차지하였다.

피핀은 아퀴타니아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크 왕국의 서부를 차지하였고,

후에 '루드비히 독일왕'으로 불리게 된 루드비히는 바이어른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를 차지하였다.

823년 후처인 유딧에게서, 카알 대머리로 불리는 네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루드비히는 유딧의 재촉으로 이 막내에게 알라마니아를 상속하기 위해 829년 제국의 분배를 변경하였다.

이 새로운 결정에 대하여 전처의 아들들이 반항하였다.

이로써 비참한 형제 싸움이 시작되었고, 제국의 와해를 초래하였다.

 

베르당 조약(843)으로 제국이 마침내 삼분三分되었고, 서구 국제사회의 통일이 다시 파괴되었다.

카알 비만왕(肥滿王, 876~887)은 잠시(885~887) 상속을 통해 전 제국을 하나로 합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국의 내적인 붕괴와 881년경 그 절정에 도달한 노르만인의 약탈로 인한 궁핍은

카알 비만왕의 폐위를 초래하였다.  결국 889년 카롤링거 왕조는 전멸하였다.

오토 대제가 962년 제권帝權을 탈환하기짜지 제권은 이탈리아의 귀족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제국의 정치적 붕괴는 그 결과로서 서구문화와 교회의 완전한 쇠퇴를 초래하였다.

 

로마교회는 레오 4세(847~855) 때, 특히 니콜라오 1세(858~867) 때 잠시 진보를 보였으나

그후 무서운 침체 즉 '암흑의 세기"로 들어갔다. 니콜라오 1세는 중세 교황직의 최초의 위대한 대표자였고,

그레고리오 7세와 인노첸시오 3세의 교회정책 이념을 그에게 소급되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국가의 영적인 용건에 대한 간섭으로부터 교회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는 것이었다.

반대로 자신이 국가의 세속적인 용건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

러나 교회의 영적인 우두머리요, 종교적, 윤리적 질서의 보호자로서

그는 군주의 윤리생활까지도 감시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이 어떤 규정과 쉽게 결부될 수 있다는 것은 이해될 수 있다.

847~852년 간에 랭스의 대주교 관구에서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假(거짓 가)이시도로 법령집'

그 길잡이로 교황에게 제공되었는데,

것은 대부분 위조이거나 변조된 교황의 서한과 훈령의 집대성으로서,

처음에는 랭스의 힌크마르 대주교로부터 속주교들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편자編者들은 교황의 권력을 끌어댔는데, 교황만이 주교들을 재판할 권리가 있었다.

편자들은 또한 속권俗權의 침해에도 언급하고, 이에 대해서도 역시 교황의 최고권을 내세웠는데,

그들은 이러한 권력을 위조된, 이른바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로써 뒷받침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가 여기서 처음으로 인용되었다.

이와같은 교황권력의 강조는 애당초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교황지위의 놀라운 향상에 근본적으로 기여하였다.

교황들이 위조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선의에서 그 진실성을 믿었고,

니콜라오 1세처럼 곧 그들도 그것을 즐겨 이용하였다.

원문의 진실성에 대한 의심은 15세기에 가서야 공공연해졌다. 그

러나 그것은 중세의 국가적, 교회적 사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정치문제에 대한 중세 교황직의 권리 주장은 오래동안 이 문서에 근거하였다.

 

Tip: 콘스탄티누스의 증여― 750에서 760년 사이 증서 형식으로 된 위조물로서,

이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경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길 때,

실베스텔 교황(314~335)과 로마 성좌에게 전 서로마제국의 통치를 위임한다는 내용이다.

그 근거는 5세기에서 유래하는  오랜 실베스텔 전설인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나병 및

실베스텔 교황에 의한 기적적인 치유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콘스탄티누스가 증여했다는 꾸며낸 이야기.

 

이로써 교황직은 니콜라오 1세에 의해, "843년 이래 황제권력이 위축된 공백 속에서

잠시 최고권위"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망이후 교황직은 곧 전반적인 몰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같이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다.

보편적 황제권력의 뒷받침을 상실한 교황직은 타락한 로마 귀족들의 당쟁에 재빨리 휩쓸려들어가서,

그 보편적인 의의를 상실하고 지방권력의 노리개가 되었다.

 

이미 체살 바로니우스(1607)는 880~1046년간의 시기,

다시말해서 카롤링거 왕조의 종말에서부터 그레고리오 개혁의 시초까지를 '암흑의 시기'로 특징지었다.

이 기간 중의 48명의 교황들이 모두 비도덕적은 아니었다.

사실 베네딕도 4세(900~903)와 같은 몇몇 교황들과,

962년 이후 오토 왕조 시대의 일군의 교황들은 사생활에 있어서도 존경할 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로마 주교좌가 보여준 모습은 교황직의 보편적인

중요성에 전혀 어울리는 것이 못되었다. 로마 주교는좌는 평범한 일개 지방교구가 되어버렸고,

당시의 다른 많은 교구처럼 야만적이고 지배욕에 사로잡힌 귀족들의 정치적 파벌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같은 슬픈 상태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귀족들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교황직은 황제가 사라진 이래 그들에 대해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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