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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오토 대제와 서구 제권의 갱신 ( 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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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대제와 서구 제권의 갱신

 

프랑크 왕국은 오토 대제(936~973)하에서 비로소 전반적인 붕괴에서 회복되었다.

오토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함으로써 내적 개혁, 특히 교회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내적 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그는 이탈리아와 로마를 장악함으로써 서구 제권에 새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였다. 

제권의 보편적 의의가 다시 인식될 수 있었다.

그는 적어도 당분간 교황직까지도 로마인의 당파싸움으로부터 구출하고,

교황직에 그 보편 교회적 그리스도교적 과제를 지시할 수 있었다.

 

제국 내의 질서와 안전이 결정적으로 회복되었다.

오토는 그의 아버지, 작선 출신의 하인리히 1세(919~936)로부터 유리한 조건들을 넘겨 받았다. 

그러나 아직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대내적으로는 부족들의 사리사욕을 근절하고, 왕국의 지배를 견고한 토대 위에 올려 놓아야했고,

대외적으로는 슬라브족,   특히 항가리인이 국토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오토는 어려운 전쟁 끝에 마침내 로트링건과 프랑크, 슈바아번과 바이어른의 부족 반란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를 일가 사람들로 대치시켰다. 바이어른은 그의 형 하인리히에게 맡겼고,

뷰바아번 공작령은 그의 장남 리우돌프에게 주었다. 그의 사위 콘라드 적발(赤髮)은 로트링건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오토 자신은 프랑크를 차지하고, 작선은 그의 충실한 부하 헤르만 빌룽에게 맡겼다.

그러나 이들은그를 거슬려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때마침 다시 침입해온 항가리인과 손을 잡는 것조차 꺼리지 않았다.

오토는 다시 형세를 진압하였고, 955년 항가리인에게 승리한 후 비로소 왕국을 재정리힐 수 있었다.

 

나쁜 체험으로 교훈을 얻은 오토는 왕국을 정리하는 데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그것은 제후 주교들로써 그의 중앙권력에 대한 확실한 지지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카알 대제 이후 주교직은 언제나 제국통일의 단호한 옹호자로서 입증되었다.

주교직은 끊임없는 귀족들의 욕망으로부터 교회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을 필요로 하였다.

반대로 왕은 독신생활을 하는 주교화 신부들로부터, 그들이 상속과 일가세력을 형성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왕권에 대한 야심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황제와 교회의 이해관계가 여기서 일치하였다.

대부분의 교회재산은 황제의 증여에서 유래하였고, 그래서 교구와 수도원을 제왕의 사유교회요

국토로 간주하고, 그렇게 취급하려는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토는 의식적으로 교회의 소유지를 늘리고, 제후의 특전과 황제의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주교들의 지위를 구축하려 하였다.

그는 주교들에게 온갖 유의 백작의 권리, 재판권, 조세권, 주화권, 개시권開市權, 공무면제의 특권,

그밖의 권리들을 위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성직자 제후권력과 중세 봉건교회가 탄생할 토대를 놓았고,

그것은 1803년 교회재산의 대 국유화까지 독일의 결정적인 외모 구실을 하였다.

 

오토는 이와같은 조처를 통하여 일찌기 카알 마르텔이 함부로 교회재산을 침해하고

교회를 국가이해에 예속시켰던 것처럼, 교회를 국유화하는 것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가를 교회화하였다. 그리스도교적 국가와 교회가 하나를 이룬 그의 정치적 개념에서,

국가적, 교회적 이해관계는 서로 융합될 정도로 일치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 일에 성공하였다.  이후 제국교회들이 항상 독일 왕권의 확실한 지지자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성권聖權과 제권帝權간의 투쟁에 있어서도 제국교회는 철두철미하게 왕의 편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의 교회정책은 이후의 혼란을 초래할 징후를 지니고 있었고,

당시 그 위험성을 지적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교회개혁 사상의 대표자인 마인쯔의 프리드리히 대주교는 이 혁신을,

그것이 교회를 속화시킬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으므로 단호히 반대하였다.

실제로 오토가 주교직 구성에 영향력을 미쳤고, 교구장직과 수도원장직의 수여권을 자기 권리로 주장한 것은,

주교직에 대한 왕의 높아진 관심과 부합되는 것이었다.

교회법상의 선거가 왕에게는 순 형식에 불과했다. 왕이 후보자를 결정하고,

후보자에게 교구를 위임하는 표시로 주교 지팡이를 넘겨 주었고,

하인리히 3세 때 부터는 주교 반지도 주었으며, 그 대신 복종의 선서를 받았다.

10세기에 가서도 이와같은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불쾌감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클뤼니ㅣ 개혁운동에서 시작된 교회정신의 재 각성에 따라 왕의 간섭을

교회의 자유 구속으로 느끼게 되었다. 교회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속권 성직임명에 대한 단죄는

곧 주요 공격점이 되었다. 또한 여기서 교황직과 제권과의 최초의 대결이 불붙게 되었다.

 

제국에서의 오토의 권력은 항가리인에과의 전투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둠으로써(955) 더욱 강력하여졌다.

그는 독일을 무서운 항가리인의 재난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도 보다

높은 황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길을 개척하였다. 9

55년 이래 오토는 카알 대제에 의해 세워진 서구 제국의 재건이란 목표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960년 말, 요한 12세 교황 자신이 도움을 청하며 그를 로마로 불렀다.

오토는 961년 무장을 갖춘 강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하였다.

962년 교황 요한 12세의 장중한 마중을 받고 성 베드로 성전에서 황제로 도유되고 대관되었다.

그의 소원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가 로마를 떠나자마자 교황은 그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몰래

비잔틴과 사라센인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므로 오토는 963년 로마로 급히 돌아가서,

교회회의를 통하여 도망중인 요한 교화를 폐위시키고 레오 8세(963~965)를 선출케 하였다.

로마인들은 장차 황제의 동의 없이는 어떠한 교황도 선출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에게 선서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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