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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신성로마제국 (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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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

 

신성 로마 제국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서기 800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카알) 대제서로마 황제 대관식을 기원으로 하여 성립된
중부 유럽의 제국이다. 카롤루스(카알) 대제 이후 잠시 분열의 역사를 거듭한 적이 있기에,
962년에 로마 교황 요한 12세대관식으로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다시금 얻은
독일 왕국의 왕 오토 1세를 본격적 출발로 보는 입장도 있다. 후에 정착된
정식 명칭은 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


 

이에 대해 중세 로마 제국은 "로마의 제위를 계승하는 정통 황제는 자신뿐"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정작 카롤루스 자신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카롤루스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이 서로마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점차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정통성이 962년 동프랑크오토 1세가 세운 제국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센 왕조부터를 신성로마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아예 '서로마제국'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고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을
카롤루스의 대관식으로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시킨 것이며,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대제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800년의
서로마 제국과 926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왕조가 3분할되어 쪼개진 후에 생긴 동프랑크 왕국에서 대가 끊기자,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911~918)와 뒤를 이은 작센의 영주 하인리히 공이
독일 국왕(하인리히 1세, 919~936)에 선출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을 독일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독일 왕'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은 자그마치 600년 뒤인 막시밀리안 1세(1508년 즉위)의 일이다.
이는 그가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황제로서의 대관을 받지 못하고 단지
교황 사절이 교황을 대리해 수여한 로마 황제 칭호로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립 후 얼마 안 가 분열 수순을 밟은 서로마 제국이 재수립된 계기는
하인리히의 아들인 오토 1세(936~973)에 의해 작센 왕조 하의 서로마 황제 제위가 수립되면서부터이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이탈리아(롬바르디아)를 정벌해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962년).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비잔티움 제국(동로마)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대제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대제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대제의 뒤를 이은 오토 2세(973~983. 사실 967부터 아버지와 공동황제)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왕위 983~1002, 제위 996~1002)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탄생 배경에서 보다시피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 및 비잔티움 황제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였으며, 그에 따라 서로마의 모든 땅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했지만 물론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설정놀음에 불과했다.
구 서로마 영토에 발 걸치고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이슬람권에서는 스스로를 로마의 계승자라 칭하였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권과 접해 있고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로 스스로를 부르고 있으며
다른 국가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티움 접수 후 로마의 후계라 자칭한 것에서 이슬람이 로마의 존재를 인식,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권에서는 진짜 직계인 비잔티움 제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영국프랑스, 에스파냐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 식의 이론을 펼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되,
자신들의 나라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아버렸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무리한 드립을 더 이상 날리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아주 자연스럽게 독일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어쨌든, 오토 대제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대제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an)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오토 대제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성
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오토 대제의 이러한 정책으로 황권이 강화되고 동시에 교황권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황권 강화에 반발한 영주들의 불만에, 황제의 성직자 임명을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간주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정책으로 하인리히 4세(독일 왕위 : 1056~1084, 제위 1084~1105)와
그레고리오 7세 사이에 저 유명한 서임권 논쟁과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황제 즉위에 성공한 것에서 보듯이 불과 7년만에 교황은 역관광을 당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내전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이를 영방국가체제라 부른다.


 

수십년간 단절되었던 제위를 계승한 호엔슈타우펜 왕조(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1152년 즉위, 제위 1155~1190)는 이에 맞서서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도리어 황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254년 프리드리히 2세(왕위 1112~1220, 제위 1220~1225)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 홀란트 백작 빌헬름(재위 1247~1256)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이에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영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핸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황제로 추대하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알폰소(재위 1257~1275)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를 대공위시대(1254 ~ 1273)라고 부른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제위 1273~1291)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1346년 즉위, 제위 1355~1378)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Goldene Bulle, 금인장으로 내린 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카를 4세의 것이었다)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중세 후기에 가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계속 이어받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성립된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과 그 손자 카를 5세의 경이적인 군사활동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이탈리아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고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제국은 대내적 분열과 대외적 충돌로 홍역을 치르게 됐으며
그 결정판인 30년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지역의 영방들이 독립국가에 가까운
자립이 허용됨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는 남독일과 오스트리아 외에는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17세기 이후 이렇듯 부침을 겪는 모습에 볼테르는 형식밖에 없는 이 제국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라고 비꼬았다.
 원래 볼테르는 모두까기 인형이니까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독일 지역내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라이히스카머게리히트).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그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중, 오스트리아의 약화를 노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1806년 남독일의 16개 영방들이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를 선언하여
프란츠 2세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서 84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으로 소멸하게 된다.
애초에 프란츠 2세는 "정통 오스트리아"주의자였고, 제국 해체 전 이미 자신을
오스트리아 황제로 선포하며 유명무실한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고 오스트리아의 우월함을 강조하려고 했다.
신성 로마 제국 따위 없어도 오스트리아는 강대하다!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먼저 수작을 부렸다. 참고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폼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할 정도로,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착은 대단했던 듯하다
.제왕병자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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