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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그레고리오 개혁과 임직권(任職權) 논쟁( 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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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개혁과 임직권(任職權) 논쟁

 

그레고리오 개혁은 그 교회 정책적인 지향때문에 수도회적 클뤼니 개혁운동과 구분된다.

두 개혁은 모두 교회의 자유개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클뤼니는 제후와 주교들에 의한 그 내적 생활의 침해로부터의 해방으로 간주한 한에서

곧 그것이 확대되어 적극적인 내용을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유'를 개인이 법질서나 특별한 특전에 근거하여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의무의 총체로 이야기 했다.

이런 것들이 누군가에 의해 손상되면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그레고리오 개혁의 목표였던 '교회의 자유'도 처음에는 역시 교회를

세속의 권세가들이 간섭으로 해방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하였고, 또한 그 특성을 얻게 된

이 운동은 교회와 수도회가 왕후와 귀족에 의해 양도되고(속인에 의한 임직),

또한 자주 철면피한 방법으로 재정적으로 착취되던(성직매매聖職賣買) 그와같은 처사를 공격하였다.

또한 종교적, 교회적 임무영역의 자주성을 보증하기 위해 교회의 자유로운 선거권의 회복을 요구하였다.

물론 교회에 고유한 특권을 방해받지 않고 행사할 권한을 교회에 돌려 줄 것도 아울러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한 보편타당한 법기준이 아직 없었으므로 그 윤곽을 정하고,

그 관철에 착수하는 것이 이 운동의 관제였다. 그래서 정치권력과의 투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같은 새로운 정신을 로마에 소개한 이들은 독일 황제 자신들이었다.

하인리히 3세에 의해 임명된 레오 9세(1049~1054) 교황은 이 개혁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교황직에 그 보편적 의의를 다시 부여하였고, 그 수위권을 강조하였다.

다음, 니콜라오 2세 교황이 1059년 교황선거법령을 통해 교황선출권을 주교, 추기경들에게 위임하였을 때,

그것은 직접적으로 로마 귀족 당파의 음모를 겨냥하고 아울러 독일의 제왕을 겨냥한 것이었다.

물론 니콜라오 2세(1058~1061)는 미결조항에서 독일 왕 하인리히 4세(1056~1106)에게

교황선거에 있어서 일종의 명예상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그러니 이 특전규정이 정확하지 않았고, 그래서 바로 이 때문에 이후 대결이 일어나게 되었다.

 

교황선거법은 그후 여러 차례 보완되었다. 이미 1100년에 모든 추기경들이  선거에 참여하였고

그후 즉 1179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3분의 2의 다수결의 원칙이 규정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4년 콘클라베(Konklave)를 도입하였는데,

이로써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들은 외부로부터 차단되게 되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1918년의 교회법전에서 법전화되었고, 1945년 비오 12세에 의해 약간 보완돠었다.

 

교회와 국가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그렇게 빨리 해결될 수 없었다.

그것은 제국 및 사회의 전 구조와 아주 긴밀하게 관련되는 문제였다.

프리드리히 1세 적발제(1152~1190)가 황제적 세계지배 이념을 다시 강력히 추진하려 하였을 때,

다시 속권과 교권간의 격투가 일어났다.그는 알렉산델 3세 교황(1159~1181)과 대항하게 되었다.

격렬한 투쟁은 20년이나 계속되었다. 황제 편의 4명의 대립교황, 전쟁, 유혈은 이 비참한 대결의

특징을 나타낸 것으로서, 그것은 마침내 강화가 다시 성립되기까지 그리스도계에 많은 불행을 초래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권력투쟁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것은 당시의 사상에서 이해될 수 밖에 없다.

당시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계의 유일한 주인이었다.

사람들은 루가 복음 22장 38절에서 그리스도가 세계지배를 위해,

두 칼자루로 상징되는 양검론(兩劍論)이 두 세력을 규정한 것으로 추론하였다.

즉 하나는 세속적인 것으로 그 칼자루는 황제의 손에 있고,

또 하나는 영적인 것으로 그것은 교황의 손에 있다.

그런데 그레고리오 시대의 교회법 학자와 신학자들은 이 이론을 오로지

교황에게 관련시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즉, 두 칼자루는 결국 하나이고, 또한 그것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영적인 것은 교회가 행사하고, 세속적인 것은 황제에게 빌려주어 교회를 위해,

또한 교회의 이름으로 행사하게 한다. 사람들은 교회의 파문을 영적인 칼자루로 간주하였다.

이와같은 일방적인 교회의 관념에서 곧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세계질서를,

유럽의 모든 국가에 대한 교황의 완전한 최고 봉토 지배권으로 개혁하려는 시도가 나왔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제권과의 충돌을 초래했다.

 

프리드리히 적발왕이 옛 제국의 이념을 소생시키고, 교황의 우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하였다.

그러나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이 전 유럽에 대한 일종의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슈타우펜 왕가의 제권은 이 싸움에서 패하였다.

그러나 이 왕가의 멸망 후 오래지 않아 교황의 세계국가도 붕괴하였다.

 

되돌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교회와 그의 영적 임무에 축복을 초래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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