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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서구의 새정신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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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새정신

 

클뤼니 및 수도생활에서 시작되어 증대 일로에 있던 종교운동은 곧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전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 한 시대의 그리스도교적 성격을 바로 파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신심信心과 이웃사랑의 여러가지 형식, 교회와 자선을 위한 신자들의 헌신, 예술활동과 저술,

위대한 공동체 임무의 참여 등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의 외적 업적에 의해 측정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내적 깊이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다.

 

수도생활과 완덕추구의 수준은 언제나 한 시기의 종교적,

교회적 생활의 깊이를 알기 위한 가장 확실한 척도이다.

중세중기가 새로운 형식의 수도생활과 성직자와 평신도의 수덕생활의 전성을 초래하였다면,

그기서 그 종교적 특징만이 아니라 영적생활에 대한 개인적 실현에의 열망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으로 감동된 남녀들이 각계 각층에서 숱하게 수도생활을 지향하였다.

중세 전기의 베네딕토회의 단일한 수도형식에서 모두가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개인적인건 집단적이건 광야에서 은수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았고,

또는 고행하고 설교하며 유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청빈과 자발적인 금욕에서의 사도적 생활은 그들의 생활이상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불같은 종교심과 고대 그리스도교적 카리스마를 지닌 로무알도(951~1027) 성인이 활약하였다. 그의 전기작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전 세계를 그의 속죄정신으로 사로잡고,

그것을 "유일한 은수소(隱修所)로 변화시키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청춘시절에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살인죄를 속죄하기 위해 972년경

고향인 라벤나 지방 글라세의 성 아폴리나리오 수도원을 찾았다.

이 수도원의 정신과 베네딕토 회칙은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다.

그는 베네치아 부근의 산림에서 은수하는 마리노의 엄격한 지도를 받으러 갔고,

다음 피레네의 클뤼니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마침내 옛날 사막의 은수자들을 본받아

자신의 고유한 이상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 왔다.

 

그리하여 그는 라벤나 부근의 치명적인 늪과 아페닉 산맥의 협곡에서 기도생활을 위한 고독을 찾았다.

하느님과 영혼에 대한 열정에서 가끔 다시 나타나 속죄를 설교할 때마다

하느님께 대한 그의 완전한 헌신과 진지한 설교로써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이후 그의 수도원에서 교회개혁가들이 나왔다. 1057년 이래 추기경이요

로마 개혁파의 우두머리였던 베드로 다미아노(1007~1072)는 '카말돌리회 수도자였다.

 

퀼른의 성 부르노(1030~1101)는 카르투지오 수도회의 창설자(1084)가 되었다.

그는 랭스 교구에서 화려한 생애를 보낸후 공생활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동지 6명과 같이 그르노불의 험한 암산인 그랑드 사르트르즈에 최초의 '카루투지오회'를 설립하였다.

그후 그는 남이탈리아에서 칼라브리아의 라 또래와 보스꼬의 산 스테파노에 수도원을 세웠다.

거기서 1101년에 사망하였다.

 

절대적 침묵을 지키는 '카르투지오 수도자'들은 기도와 명상으로 항상 참된 종교심과 내적 힘을 간직하였다.
그들은 중세 후기와 종교개혁마저도 극복하고  존속하였다.

그들에 대하여 사람들은 "카르투지오 회원들는 개혁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변질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평하였다.

 

그러나 쇄신을 향한 간단없는 욕망은 바로 도상途上의 교회와 그 제도의 본질에 속한는 것이 아닌가?

클뤼니 수도자들은 그것을 느끼게 되었다. 모든 것에 침투하는 개혁정신으로

서방의 교회를 쇄신한 바로 같은 세기에, 그들의 수도원 자체내에서 베네딕도회를 쇄신하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시토회는 베네딕도회의 한 개혁분파이다.

 

몰렘의 로베르 수도원장(1111)은 1098년 20명의 동지와 더불어 시토의 황무지에

본래의 엄격한 베네딕토회적 개혁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의 후계자, 알베리히(1099~1109)와 스테파노 하르딩(1109~1133)

수도원장들이 회칙(사랑의 헌장)을 작성하였다.

이 회칙에서 특히 사도적 청빈과 기도를 위한 고독, 정기적인 수공업이 강조되었다.

그들은 전통적 봉건질서를, 그것과 쉽게 결부될 수 있는 재산의 위험때문에 수도원 영역에서 거부하였다.

이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도록 도운 사람이 바로 부르군도의 젊은 귀족, 글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였다.

 

베르나르도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1112년 4월 시토 수도회의 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30명의 동지를 동반하고 있었다.

그는 이 수도원에 처음으로 자극을 주었고, 그 새로운 이상理想에 예상밖의 팽창력을 부여하였다.  

죽을 때까지 그는 68개의 수도원을 세웠다.

수공업의 강조, 농경과 농업의 종사는 높은 문화적 의의를,

무엇보다도 동부지방을 개척하고 그곳에 포교함으로써 수도회에 부여하엿다.

 

그러나 베르나르도의 본연의 사명은 영적영역에 있었다.

베네딕도 수호생활의 성화聖化와 심화深化 전교회의 쇄신이 그의 목표였다.

사람들은 베르나르도를 그의 세기의 신탁神託이요 종교적 천재라고 말하였다.

그는 위대한 개혁가요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첫째로 수도자요 성인이요 신비가로 머물렀다.

 

재속성직자의 개혁도 제외되지 않았다.

우선 주교좌성당 참사회원과 공주(共住)성직자단 성당참사회원들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

독립된 외부 본당이 별로 많지 않았고, 성직자의 대다수가 공송기도(公誦祈禱)를 위해

조교좌성다이나 모본당의 중앙성당에 집중되어 있던 시기에 있어서,

이러한 공주성직자단 참사회원들을 위해 좋은 생활질서를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이미 성 아우구스띠노는 히뽀의 주교로서 그와 같이 생활하는 성직자들에게 고정된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 

공주성직자들에게는 수도자에게 있어서처럼 재산의 소유가 금지 되어 있지 않았고,

수도서원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레고리오 개혁은 재속성직자의 성화를 중요시 하였다.

그러므로 성사적 사제직 및 교회안에서의 사제의 지위에 대한 그 새로운 강조는

재속 성직자의 내적 쇄신을 전제로 하였다.

새로운 사목사제는 사도적 청빈과 독신제, 교회장상에 대한 순명과 위계적인 교회의식,

신학교육과 나무랄 데 없는 사생활로 장식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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