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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청빈운동, 이단, 종교재판 ( 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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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운동, 이단, 종교재판

 

성서주의와 예수를 따름

 

이미 10, 11세기의 수도회 개혁에서 원시교회의 사도적 청빈으로의 복구가 요청되었다.

사도적 생활이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모범을 따라 가난한 순회선교사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이상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욕망은 십자군의 감명으로 바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여

전 서구를 휩쓸었다. 비단 성지에서 돌아온 사람만이 아니라 성지에 남은 사람들에게도

가난한 구세주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였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들을 자극하였다.

사람들은 복음에 관심을 가졌다. 수도자와 성직자들이 성서를 읽는 데 전심하였다. 그

러나 단순한 평신도들도 조그만 모임을 갖고 성서의 말씀과 해석을 들었다. 그

들은 직접 성서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생활을 배우려 했다.

그리스도교적 백성은 참으로 하느님 말씀에 굶주려 있었다

그들은 글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또는 노르베르트와 같은 위대한 설교가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

멀리서 무리지어 모여 들었다.

 

실제로 예수의 가난한 생활을 당시의 상태와 비교할 때,

제도적인 교회에 대한 반대가 쉽게 전개될 수 있었다.

중세의 봉건교회는, 주교가 동시에 영주이던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부유하였다.

어디에서나 교구와 수도원들이 귀족이나 권세가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성직자는 영적생활을 규정하였고, 붕건군주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번영하는 도시에서 자각한 시민계급이 성장하였고,

이미 이 계급은 성직자의 지도를 순순히 따르려 하지 않았다.

평신도가 교회 안에서 대두하였고, 종교문제에 관해 스스로 판단하려 했다.

그리하여 평신도는 성서를 택하였다. 평신도의 탐구가 교회 안에서 진행되고,

진지한 내적개혁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적이고 반교회적인

사상과 결부되어 불운을 초래할 위험성도 있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교회가 이 운동을 장악할 수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반대해야 할 것인가에 있었다.

 

네델란드의 열렬한 개혁가 탄케름성직자의 모든 소유물을 반대하고,

성직자의 세속적인 생활을 아주 신랄하게 비난하였고,

마침내 교계제도와 성사적 교회에 대한 심령화(心靈化) 투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성체성사도 거부하였다. 그는 1115년에 민중에 의해 타살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단을 계속 영향을 미쳤다. 급진적인 이탈리아의 속죄설교사

브레쉬아의 아르놀드도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한 교회를 요구하고, 교황직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로마시의 정치적 책동에 끼어 들었을 때, 최고 정치에 걸려 들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적발제는 1115년 그를 사형에 처했다.

그의 제자들인 '아르놀드파'는 그후 왕왕 발두스파와 카타리파로 넘어갔다.

 

발두스파는 리옹의 부유한 상인 베드로 발두스에 기인한다.

그는 1173~1176년경 마태오 복음 10장 5절 이하를 읽으면서 청빈이상을 발견하였다. 그

때부터 그는 청빈과 속죄설교의 엄격한 사도직을 이행하기 위해 그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선사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난한 자들' 또는 '리옹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자칭하였다.

현상을 가장하여 비판하게 된 그들의 선의의 설교는 신앙에 대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리옹의 주교는 그들이 평신도로서 신앙문제에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 하여 그들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발두스는 교황에게 호소하였다. 그는 1179년의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출두하였고,

교황 레오 3세는 그의 청빈이상을 치하하고, 신앙선포를 멀리하는 한에서 그에게

순수한 속죄설교를 허락하였다. 이 조건은 막연하고 분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리옹의 주교는 발두스가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하여 두번째로 그의 설교를 금지하였다.

발두스는 다시 로마에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황 루치오 3세가 예리한 반응을 보였다.

교황은 1184년에 그에게 설교활동을 완전히 금하고, 그간 과격한 형식을 취하게된

그의 운동 전체를 비난하였다. 그러자 발두스는 반항하였다.

그는 그의 내적인 소명과 그리스도에 의한 개인적인 파견을 끌어됐다.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완전한 청빈에서 생활하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설교할 권리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파문과 박해로 응수하였다. 지하로 들어간 이 운동은 점점 교회를 적대시하고,

이단적인 신조를 채용하게 되었다. 발두스는 1217년에 사망하였다. 그

의 운동의 잔당과 그 이름은 이후 이탈리아의 프로테스탄트에게로 넘어 갔다.

 

1170년경 처음으로 벨기에와 네델란드에서 열심한 부녀자들, 이른바 베긴회원이 등장하였는데,

그들은 기도와 성서강독에 종사하고, 수공업, 병자간호, 소녀의 종교교육에 전념하고,

본래으 수도서원을 하지 않고, 이른바 베긴 구내에서 공동생활을 영위하였다. 밀라노 지방에서

'억겸파(抑謙派)로 불리는 모직공들이 유사한 종교단체를 형성하였다. 그

들은 원시 그리스도교의 사랑의 공동체(사도 2, 44)를 본받아 생산조합을 형성하고,

모든 사유재산을 거부하였다. 여기서도 점차 급진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을 때,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1201년 이 운동을 교회에서 장악하고 성직자의 지도 밑에 두게 되었다.

일부는 수도회에 가입하여 아우구스띠노 회칙을 따라 생활하였고, 일부는 세속에 남았다. 그

러나 그들은 이 수도원의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기도생활로 그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들은 '제3회의'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1216년 밀라노 교구에 이와같은 억겸파 수녀원이 150개가 있었다.

이 수녀회는 1571년까지 지속되었다.

 

카타리파: 이상의 모든 그룹은 다같이 그리스도교적 기초를 갖고 있었던 반면에,

카타리 운동은 확실히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마니교적 이원론에서 발생한 것이다.

9세기에 비잔틴을 거쳐 발칸 지방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의 바울로치아누스파는 마체도니아의

한 시골 사제인 보고밀이 10세기 전반기에 총괄한 옛 그노시스적 관념을 함께 전했었다.

 

이에 따르면 세상은 악마, 즉 구약의 악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지배된다.

또한 인간의 순수한 영혼도 나쁜 물질세계로 추방되었다. 신약의 善神은 인간에게 해방되는 방법과,

청정자淸淨者로서 인간의 참된 고향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기위해

그의 천사의 하나인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였다. 이를 위해 고행과 완전한 속리俗離가 필요하다.

나쁜 물질과의 모든 접촉은 사람을 불결하게 만들고, 전 피조물은 본래 죄를 짓게 한다.

'완전자完全者는 결혼, 성교, 육식뿐만 아니라 온갖 수공업, 물질으 소유, 부유富裕를

아주 세심하게 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행상인과 귀향하는 십자군 참가자들을 통하여 12세기에 서구에 도입되어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신속히 보급되었다.

그것은 개별적인 그리스도교 사상과 결부되었다. 그 신봉자들은 가톨릭교회식으로 단체를 조직하고,

위계와 교구제도를 만들었다. 1167년에는 뚤루즈에서 카타리파의 대공의회가 개최되었다.

그들은 죄를 짓게하는 재물을 소유하는 부유한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그들 자신의 가난하고

모든 재물을 배척하는 교회를 내세웠다. 이로써 그들은 '복음적, 청빈적' 교회를 꿈꾸고 있던

많은 급진적 개혁가들의 생각을 너무나 적중시켰고, 순박한 민중들 앞에 그들 자신의

비그리스교적 이원론적 세상 경멸사상을 그리스도교적 금욕주의의 이상형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은 모범적인 금욕생활을 영위하는 이상적인 그리스도교인으로 자처하였고,

반면 가톨릭교회는 사탄의 회당으로, 사제는 위선적인 죄인으로, 성사는 마귀의 산물로 표현되었다.

 

나아가서 그들은 역시 철저하게 국가와도 투쟁하였고 황제를 사탄의 대리자로,

제후를 사탄의 조수라고 하였다. 남부 프랑스, 특히 알비(Albi, 그래서 '알비파'로 불린다)

지역에 널리 유포됨으로써 그들은 곧 바야흐로 프랑스 왕권을 반대하여 투쟁에 나선

권력자들과 손을 잡게 되었다. 긴장은 마침내 피 비린내 나는,

반종교적이고 반정치적인 알비파 전쟁(1209~1229)에서 폭발하였다.

 

종교재판

 

그들을 거슬러 제정된 '이단자 규탄'과 종교재판도 이러한 이중적 견지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카타리파는 그리스도교 사회의 종교적 기반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공격하였으므로,

그들과 대항하여 국가와 교회가 같이 투쟁하였다. 그들과 대항하여 국가와 교회가 같이 투쟁하였다.

이미 1197년 아라곤 왕 베드로 2세는 카타리파를 국적國敵으로 선언하고, 그들의 화형을 명하였다.

프랑스 왕 루이 7세 및 영국 왕 헨리 2세는 1179년 이단자에 대해 엄한 규정을 적용하도록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에 촉구하였는데, 이단자들은 재산몰수와 감금으로써 처벌되고,

필요하다면 무력으로 진압되어야 했다. 그후 교활 루치오 3세는 1183년 프리드리히 적발제와 협정을 맺었는데,
이에 따르면 이단자에 대한 교회의 파문 직후 국가 측에서도 그들에 대해 국가적 조치를 선고하기로 되었다.

이단자는 공식적으로 색출되고, 인도되고, 처벌되기로 되었다. 이때 종교적이거나 정치적,

이유가 얼마만큼 결정적이었는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종교적, 정치적 일치가 자명한 것으로 생각되던 세계에서,

그 통일된 그리스도교적 토대가 공격당했을 때 공동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었다.

 

알비파들에 대한 개종시도가 좌절되고 1208년 교황사적이 살해되었을 때,

인노첸시오 3세는 1209년 그들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양측에서 한없이 많은 출현을 자아내게 한 비그리스도교적인 살인행위가 20년간 지속되었다.

모든 도시의 주민들이 전멸되고 기타 지방도 황폐화되었으며 동시에 쁘로방스 문화가 전멸되었다.

외면상으로는 이단이 근절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형세를 장악하려면 아직도

수십년간 종교재판을 해야 했다. 이것을 이용한 것이 프랑스의 군주정체였고,

마침내 전투에서 승리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종교의 보호 아래 왕조의 정치적

이익이 대부분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인노첸시오 3세 때 교회소송법에서 종교재판 절차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당국은 경우에 따라서는 공식적으로 죄인과 범죄자를 취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당국은 범인이 고소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되며, 공식적으로 자진하여

범인을 색출해서 법정에 인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단자에 이와같은 절차의 적용은 1231년에 교황청 종교재판관의 임명을 가져왔다.

 

세속 당국은 주교로부터 인도된 이단자를 감금하고, 계속 이단을 고집할 경우에는 그

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속의 법정이 집행을 거부하면 세속 법정 자체가

이단 용의자로 고발되는 결과가 되었다.

인노첸시오 4세는 1252년 종교재판관들에게 경우에 따라서는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교회사에서 가장 슬픈 한 장이 시작되었다. 포악한 형리의 몰인정한 행위는 그 한계를 몰랐다.

죄없는 많은 사람들의 출혈을 가져왔고, 지나친 잔인성과 고통이 인류에게 가해졌다.

그후 이 '무서운 제도'가 분명히 망상적인 마녀신앙에 적용되었을 때, 그 절정에 도달하였다.

한없는 고통이 산상강론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한 인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분별없는 광신자에 의해 인류에게 가해졌다. 우리는 그것을 깊은 치욕과 놀라움과 더불어

확인할 수 있을 뿐,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교적인 신앙진리를 존중함에 있어서 그것을 부인하는 자와 반박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의 문제는 오늘과는 판이하게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오직 하나인 객관적인 진리만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보다 나은 봉사의 길은

혹함인가 아니면 관대한 사랑인가? 중세의 신앙인들은 그것이 전자에 있음을 확신하였다.

루터와 멜란히튼, 누구보다도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도 똑같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였다.

이단자 신문과 마녀 박해가 근세까지 비텐베르크와 제네바에서 있었고,

퀼른과 파리에서처럼 굉장히 많고 가혹하였다. 18세기에 비로소 계몽주의가 그것을 폐지시켰다.

 

그러나 신앙의 위험을 극복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또 다른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도미니꼬가 그 시대에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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