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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대탁발수도회(大托鉢修道會)/ 도미니꼬 (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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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탁발수도회(大托鉢修道會)

 

위대한 성인들이란 언제나 그 시대의 특별한 필요와 어려움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다.

아씨시의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는 내면적인 소명과 은총에서 당시의 교회와 사회에 그 처해 있던

큰 딜렘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즉 부유하고 강력해진 교회 및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그리스도교 사회는 그들의 재물에 굴복하고,

무산 시민층과의 접촉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일치를 구할 수 있는 길은 권력과 폭력이 아니라 복음의 정신으로써 분열을

내면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꼬와 도미니꼬는 그리스도를 문자 그대로 모범하여 청빈이상을 솔선수범함으로써,

그러나 동시에 타인의 재물을 배척하거나 또는 소유뮬 자체를 나쁜 것으로 형용하지 않음으로써,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2고린 6,10)고

한 바울로의 말과 같이 단념하고 동시에 소유하는 길을 가르쳤다.

 

프란치스꼬와 그의 수도회

 

프란치스꼬는 1181년 아씨시에서 출생하였다.

원대한 계획으로 가득찬 근심없던 청년기를 거쳐 1205년 봄, 마침 아폴리아로 가는

십자군을 따라가던 중―거기서 그는 기사騎士의 임명을 받으려 했다―그는 청빈사상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속죄와 이웃사랑에서 완전히 금욕적 생활을 하였다.

1206년 그의 아버지가 그를 집에서 추방하자, 그는 기뻐 노래하고 구걸하며 지방을 두루 다녔다.

아씨시의 뽀르시운쿨라 소성당에서 1208년 내지 1209년, 마태오 복음 10장 5절 이하 대목을 통해

그에게 생활방침이 제시되었다.

 

그것은 구세주의 인자하신 사랑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인간과 전 피조물에게 전하고,

그들을 회개시키고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수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그들과 같이 그는 1209년 내지 1210년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그의 생활방침의 실천과 설교의 위임을 간청하기 위해 로마로 갔다.

교황은 이 두가지 청을 다 들어주었다(그의 꿈의 전설). 그때 프란치스꼬는 부제품을 받은 것같다.

그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념은 미증유의 속도로 전파되었다.

그는 속죄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면서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스페인을 편력하였다(1214).

그는 카타리파와 무어인들을 회개시키려 했다. 그러나 무력과 권력으로써가 아니라 완전히 작은 형제로서 ―

그는 자기자신과 그의 동료들이 이렇게 불리기를 원했다. ―

사랑과 겸손과 기쁨으로써 회개시키려 했다. 병때문에 모르코로 가지 못했고 그

래서 1215년 아씨시로 돌아왔다.

 

그의 수도회는 처음부터 약진을 보였다.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어디서나 각계각층을 망라한

큰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젊은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그는 교황과 주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주민들에게서도 크게 신뢰를 받았다.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1219년에 에집트로 가는 십자군을 따라갔을 때,

그는 용감히 다미에테 앞에서 벌어진 전쟁을 무릅쓰고 술탄을 찾아가 그에게 구세주의 사랑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그는 십자군의 사명에 새로운 길을 제시하였으니, 그것은 무력으로 정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프란치스꼬는 1221년 그의 수도회에 회칙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것은 완전히 그의 정신과 복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유럽의 절반을 휩쓴 형제회의 거대한 조직적 임무에 마땅해 보이지 않았으므로,

후에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된 추기경 우골리노의 공동작업으로 수정되었고,

1223년에 인가되었다. 프란치스꼬 자신은 완전히 그의 이상대로 생활할 수 있기 위해 지도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1224년부터 심한 위병과 눈병을 앓았다.

 

그는 1224년 9월 알베르노산에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되어 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주

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받았다(오상). 그리하여 그는 수난에 있어서도 십자가에 못박힌 자와

결합됨으로써 그리스도를 가장 닯은 그리스도 신자가 되었다.

고통 가운데서 그는 저 훌륭한 태양의 노래를 지었는데, 그것은 전 피조물의 찬미를 받는

하느님께 대한 넘쳐흐르는 사랑과 감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땅바닥에 누워 가난하고 헐벗은 채,

그러나 그의 형제들이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찬미가(Te Deum)를 입술로 중얼거리며

1226년 10월 3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수도회원들은 대중과의 그의 친밀성을 이어받았다. 그들은 중세기 동안 계속 민중선교사로 머물렀다.

성 글라라 수도회가 그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었는데, 이 회는 1212년 이래 프란치스꼬의

영적 지도하에 있었고, 그에 의해 아씨시의 산 다미아노 성당에 정착되었다.

또한 1221년에는 이름바 제3회가 첨가되었다. 제3회를 통해 세속에 사는 사람들도

프란치스꼬의 이상과 효력에 참여 할 수 있었다. 프란치스꼬는 교회에 청빈에 대한 사랑을 다시 부여하고,

교회의 부유함으로 인해 스캔들을 받은 사람들에게 교회를 신빙할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의 제자들은 그들의 청빈생활을 통해, 그러나 세상을 멀리하거나 세상을 경멸함이 없이

청빈이상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올바로 고수하였다.

 

도미니꼬와 그 회원

 

도미니꼬는 1170년경 카스틸리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본성이 프란치스꼬와는 판이했으나 의욕에 있어서는 그와 비슷했다.

그는 수도참사회원으로으로 1204년 로마에 여행했을 때 남부 프랑스의 카타리파 운동을 알게 되었고,

도적 청빈에서의 순회설교가로서 그들의 개종에 헌신할 결심을 하였다.

그는 프란치스꼬로부터 엄격한 청빈적 회칙을 넘겨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좀 다른 것을 첨가하였으니 그것은 견고한 신앙 설교를 위해 좋은

신학교육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도미니꼬는 이 신학교육에 특별한 가치를 두었다.

 

그가 1215년 로마로 가서 그이 새 '사제수도회'의 인가를 청원했을 때,

인노첸시오 3세는 그에게 아우구스띠노 회칙을 채택하도록 요구하였다. 

호노리오 3세는 1216년 이 새 수도회를 인가하였다.

이미 1217년에 피레네 산맥 기슭 쁘루이여에 최초의 도미니꼬회 여자수도회도 탄생하였다.

그후 이 회에 프란치스꼬와 비슷한, 속인들을 을 위한 제3회가 첨가 되었다.

 

이와같은 절대적인 청빈이상은 그후 또 두 수도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하나는 아우구스띠노 은수사회인데 1256년 교황의 인가를 받았고,

또 하나는 까르멜회인데 1228년 성지로부터 옮겨졌고, 1247년 역시 탁발 수도회로 조직되었다.

이 까르멜회에 1452년 또한 여자수도회가 첨가되었다.

 

이상 4개의 탁발수도회는 교회생활에서 큰 의의를 획득하였다.

그들은 가장 인기있는 민중선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중세중기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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