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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신학 및 대학 ( 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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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및 대학

 

중세 전기가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학의 정신에서 성서신학을 전승하고 보호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면,

11세기의 교회생활의 심화는 12,13세기에 있어서 신학적 사고의 분화를 초래하였다.

그리스도교적 서구가 교황의 지도하에서 통일체로 성장할수록 그만큼 제민족 사이의

정신적 교류가 활발하여졌다. 사상의 교류는 전래된 것을 다방면으로 연구하도록 자극하였다.

십자군에 의한 새 세상의 확대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학문활동의 중심은

수도회로부터 새로 탄생한 대학으로 옮겨갔다.

 

스콜라학과 그 대표자들

 

뚜르의 베렌가르(1088)는 성체론(聖體論)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를 부정하였다.

빵과 포도주는 상징에 불과하고, 또한 축성시에 성변화(聖變化)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초자연적 힘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1079년 그의 주장이 배척되었을 때, 그는 복종하였다.

라테라노 공의회는 1215년 미사성제에서의 축성이 참된 본질적 변화를 일으킴을 결정하였고,

이를 위해 '전질변화'(全質變化)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켄터베리의 안셀모(1109)는 '스콜라학파의 시조'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전통적 사고를 사용하면서 전 신앙재(信仰財)를 새로 이해시키고, 새로 구성하려 하였다.

신앙이 이성에 근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이성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예컨대 천주의 존재는 성서를 통해 계시에서 증명될 뿐만 아니라

또한 오성(悟:깨달을 오, 性; 성품 성)을 통해 창조물에서 인식될 수 있따는 것이다.

안셀모는 천주 존재의 소위 본체론적 증명을 채용하였다.

여기서 벌써 '신앙과 이성', '계시와 자연적 인식'의 문제가 암시되었다.

안셀모는 그리스도론과 구속론에 있어서도 특유한 길을 걸었다.

 

수도자요 볼로냐 대학의 교수인 그라시아노(1158)는 1140년경 산재해 있는

교회법령을 수집하고 정리하려 하였다. 이후 단순히 '그라시아노 법령집'으로 불리는

이 교회법령집은  1918년까지 권위적 교회법전이었던 '구교회법령집의 기초가 되었다.

 여기에 중세기 동안 여러 수집이 첨가되었다. 

그리하여 그라시아노는 '교회법학의 시조'로 불리게 되었다.

 

파리의 교수이고 후에 파리 주교가 된 베드로 롬바르두스(1160)는 종합적 교의 신학 교과서를 저술하였다.

그의 '신학 명제집'은 중세기 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신학의 발전은 13세기의 이른바 '스콜라학'에 이르러 비로소 절대적 정점에 도달하였다. 

서구는 아라비아와 유태 사상가들을 거쳐 희랍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22)를 종래보다

더욱 잘 알게 되었다. 세계 및 정신문제를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식이 그리스도교적 신앙세계의

신학적 연구를 위한 자료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 용어는 이에 적합해 보였다.

그리하여 '근대적'인 철학적, 신학적 방법이 나타났고, 곧 그것은 특히 젊은 탁발 수도회원들에게서

큰 공명을 얻게 되었다.

도미니꼬회는 大 알베르토(1280), 토마스 아퀴나스(1274), 마이스터 엑하르트(1328),

프란치스꼬회는 헬즈의 알렉산델(1245) 보나벤투라(1274), 둔스 스코투스(1308)와

더불어 스콜라학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을 배출하였다.

 

大 알베르토는 슈바아번 사람으로 1223년에 도미니꼬회에 들어갔고, 퀼른과 파리에서 교편을 잡았다.

파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제자로 맏았다. 大 알베르토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적,

신학적 방법을 체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에 적용한 최초의 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 방면에서 그의 위대한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훨씬 능가되었다.

토마스는 1226년 나폴리 부근 로카시카에서 출생하였고, 1244년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도미니꼬회에 입회하였다. 1245에서1252년까지 알베르토의 강의를 들었다.

교수가 된 토마스도 파리, 로마, 나폴리에서 가르쳤다.

 

토마스는 그리스도교적 아리스토텔리즘의 철학, 신학을 기초로 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적의 총설인,

고전적인 '신학대전'외에도 호교대전, 신학수의제변론집, 신학설제변론집, 성서주해,

아리스토텔레스 주해 등등 그밖의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중세기의 가장 천재적인 신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신비신학자요 성인이었다.

 

프란치스꼬 회원인 보나벤투라는 1217년 비테르보에서 태어나서 1243년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였고,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이 파리에서 공부하고 가르쳤다(1257~1274). 그의 신학은 아주 신비적인 성격을 띠었고,
아우구스티노와 플라톤을 지향하였는데, 무엇보다도 그의 교의신학의 요강(1257),

또한널리 읽히고 신비적이고 교화적인 그의 '하느님에게로의 정신순례'(1259)가 그러하였다.

토마스가 보다 지성을 강조한 반면에 보나벤투라는 의지를 강조하였다.

토마스에게는 목표가 神의 인식이었고, 보나벤투라에게는 神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이러한 정신을 프란치스꼬회 신학에 부여하였고,  프란치스꼬회 총장으로서(1257~74)

파리에서 교직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실천적, 사목적 임무에 대한 이해를 잃지 않았다.

수도회 내의 원시회칙파와 엄격주의파간의 알력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성 프란치스꼬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둔스 스코투스  또한 프란치스꼬 수도회 회원으로써 보나벤투라의 신학노선을 계승하였다.

그는1265년경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서 파리(1305~1307)와 퀼른에서(1307~1308)잠시였으나

아주 효과가 큰 교직활동을 하는 동안, 그의 예리하고 비판적인 방법과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마리아에 관한 사변(그리스도에 의한 예견구제豫見救濟로서의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을 통해

신학에 큰 자극을 주었다. 스코투스 역시 의지와 자유와 사랑의 우위를 강조하였다.

그는 스콜라학의 마지막 위대한 인물로 간주되었다.

 

대학의 기원

 

이 시기에 있어서 신학연구와 학문의 중심은 분명히 새로 세워진 '대학들'이었다.

1200년경 파리의 여러 학교의 교사들이 '교사단'이란 하나의 고유한 단체를 조직하였고,

그것은 미구에 독립된 법인으로서 교회와 국가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그레고리오 9세는 1231년에 이 단체를 주교로부터도 독립시키고, 많은 특전을 부여하였다.

이 무렵 볼로냐에서도 그와같은 '단체'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학생들이 연합의

주요 대표자들이 되었다(학생단). 그후 그러한 연합들이 많은 곳에서 발생하였다.

그것들이 간단히 '대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곧 빠두아(1222)와 나폴리(1224), 프랑스에서는 볼로냐와 파리외에 무엇보다도 몽쁠리에,

영국에서는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스페인에서는 빨렌치아와 살라만카(1220) 등이 학문의

유명한 중심지가 되었다. 독일에서는 14세기 중엽에 가서야 대학이 나타났는데 프라그는 1348년,

비인은 1365년, 하이델베르크는 1386년, 퀼른은 1388년이었다.

'제학(諸學)의 어머니'인 파리는 명망이 가장 높았고, 학생이 가장 많았다.

파리에서는 소르본의 로베르가 1258년경 가난한 신학연구생들을 위해 학원을 설립하였다.

그후 여기에 많은 설립이 첨가되었으나 '소르본'이 전 파리대학의 이름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파리는 철학과 신학을 육성하는 곳이 되었다. 볼로냐에서는 법학이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우선 철학과를 졸업하곤 다음 보다 높은 신학, 법학, 의학 등 세 분과 중에서 하나를 전공과목으로 택하였다.

 

대학들은 특수학교와는 달리 학생과 교수를 도처에서 받아들였다는 점과 그 학위가

그리스도교적인 서구 어디에서나 통용되었다는 점에서 뛰어 났었다.

대학들에게서 일치된 서구 정신의 보편성 같은 것이 번쩍였다.

성권과 제권과 나란히, 학문이 독립된 제3의 '세계적 직무'로 간주되었다. 

퀼른의 주교좌성당 참사회원인 로스의 알렉산델은 1284년의 그의 재치있는 우화시 '파보'에서

이탈리아인에게는 성권聖權을, 독일인에게는 제권帝權을, 프랑스인에게는 학문을,

서구 국제사회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특수한 사명으로 돌렸다.

이러한 대학 중 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 그것은 귀족과 동등함을 의미하였다.

학문이 귀족으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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