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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르네상스/인문주의 ( 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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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인문주의

 

문자 그대로는 '재생'을 뜻하는 이 시기는 고전 학문과 그 가치에 대한 관심의 확대가 그 특징기이다. 또한 신대륙의 발견과 탐험, 지동설이 천동설을 대체하는 변화, 봉건제의 몰락, 상업의 성장, 종이·인쇄술·항해술·화약과 같은 혁신적인 신기술의 발명 및 응용이 이루어졌다. 당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에게 르네상스는 무엇보다 오랫동안의 문화적 쇠퇴와 정체의 시기가 끝나고 고전 학문과 지식이 부활되는 시기로 여겨졌다.

중세라는 용어는 15세기 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세계의 몰락에서부터 고전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15세기초까지의 시기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용어이다. 이들 15세기 학자들은 자신들이 고전문화를 부활시키는 데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세가 문화적 암흑기라는 생각은 이미 이보다 앞서 페트라르카가 언급한 바 있다. 중세 말기, 특히 12세기 초반을 비롯해서 중세 말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사회·정치적 변화와 함께 지적인 변화를 야기했으며 이러한 변화는 르네상스로 절정을 이루었다. 중세 말기에 와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신성 로마 제국이 정신적·물질적 생활에서 통일되고 안정된 기본틀을 제공하는 데 점점 실패했으며 도시국가와 국민국가적인 성격의 군주국의 탄생, 민족언어의 발전, 낡은 봉건 구조의 붕괴 등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르네상스 정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처음에는 인문주의라고 불린 지적 운동형태로 나타났다. 인문주의는 중세의 지적 활동을 주도하면서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킨 철학자들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세속 문필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인문주의가 맨먼저 시작되고 열매를 맺은 곳은 이탈리아에서였으며, 그 선구자는 단테·페트라르카 같은 사람이고, 주요주창자로는 지아노초 마네티, 레오나르도 브루니, 마르실리오 피치노, 피코 델라 미란돌라, 로렌초 발라, 콜루치오 살루타티 등이 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인문주의 운동을 크게 진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방의 다수 학자들이 중요한 서적과 필사본, 그리고 그리스의 학문적 전통을 지니고 이탈리아로 피신해왔기 때문이다(→ 색인 : 콘스탄티노플 포위전).

인문주의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모든 다양한 표현과 작품에서 인간의 본성을 그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모든 철학·신학의 학파와 그 체계에 나타나는 진리의 통일성과 조화성을 강조하는 이른바 혼합주의이다. 셋째,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인간의 활동에서 가장 고귀한 형태로 인식되던 속죄의 생활이라는 중세의 이상 대신에 창조를 위한 투쟁과 자연의 정복에 대한 시도를 소중히 여겼다. 넷째, 인문주의는 상실된 인간 정신과 지혜의 부활을 고대했다. 인간정신과 지혜의 재생을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새로운 정신과 지식에 대한 전망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학문을 발달시키는 데 공헌했다. 인문주의는 전통적 종교교리가 강요한 정신의 억압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력을 자극했으며, 또한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인문주의 정신과 그것이 일으킨 르네상스는 인쇄술의 발명에 힘입어 이탈리아에서부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나갔다. 인쇄술의 발명은 문자해득 계층을 증가시키고 고전 저작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부 인문주의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는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를 들 수 있다. 그의 저작 〈우신예찬〉(1509)은 형식주의적인 경건함에 대립하는 요소로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선을 주장하는 인문주의의 윤리적 본질을 집약하는 것이다. 인문주의자들이 제공한 지적 자극은 종교개혁을 촉진했다. 그러나 막상 종교개혁이 시작되자 에라스무스를 포함한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당초의 입장에서 후퇴, 소극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16세기말 종교개혁 세력과 반동 종교개혁 세력 간의 싸움은 유럽의 에네르기와 주의력을 상당부분 소진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 지적 활동은 계몽주의의 태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르네상스의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무엇보다 미술분야이다(→ 색인 : 예술). 미술은 학문의 한 부류로 간주되고 있었으며 우주에서 인간이 처해 있는 위상에 대한 통찰뿐만 아니라 신과 그 피조물의 형상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여주는 재능과 나름의 타당한 가치를 지닌 영역으로 여겨졌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인물의 손을 통해서라면 미술은 과학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이었으며 자연을 탐구하는 수단이자 발견의 기록이었다. 미술은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서 당시에 발달한 균형과 조화, 원근법 등의 수학적 원칙에 따라 행해졌다. 마사초, 로렌체티 형제, 프라 안젤리코, 보티첼리, 페루지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라파엘로, 티치아노 등과 같은 화가들과 피사노, 도나텔로, 베로키오, 기베르티, 미켈란젤로 등과 같은 조각가, 알베르티, 브루넬레스키, 팔라디오, 미켈로초, 필라레테 등과 같은 건축가의 작품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인 13세기말과 14세기초에 중요한 '초기 르네상스'(proto-renaissance)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성(聖) 프란키스쿠스의 급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인데 성 프란키스쿠스는 당대를 지배하던 그리스도교 신학의 형식적인 스콜라주의를 배격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움과 그 영적인 가치를 설교했다. 성 프란키스쿠스에게 자극받은 이탈리아의 미술가·시인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둘러싼 세계에서 기쁨을 추구했다. 초기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는 조토(1266/67 또는 1276~1337)의 작품은 명료하고 단순한 구조와 심리적 통찰에 크게 의존하는 새로운 회화 양식을 보여준다. 조토의 작품은 피렌체의 화가 치마부에와 시에나의 화가 두초와 시모네 마르티니 등과 같은 동시대 혹은 그보다 앞선 화가들의 작품이 단조롭고 선을 주로 이용한 장식과 종교적 위계질서를 연상시키는 구성방식에 의존했던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단테 역시 조토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그의 시(詩)는 내면적인 경험과 인간 본성의 다양성과 그 미묘한 차이에 치중하고 있다. 〈신곡〉은 그 구도와 사상면에서 볼 때 중세시대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그 주제에 담긴 정신과 표현의 강렬함은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역시 초기 르네상스의 인물로 라틴어 문학을 폭넓게 연구하고 또한 속어를 사용해 작품을 집필했다. 불행히도 1348년 무시무시한 흑사병의 만연과 그에 뒤이은 여러 나라의 내란으로 인문주의 연구의 부활과 조토·단테의 작품에서 나타난 개인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해 점점 증가하던 관심이 침체되었다. 르네상스의 정신이 다시금 그 면모를 드러내게 되는 것은 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401년 피렌체에서는 산조반니 세례당의 청동문 제작을 놓고 경합이 벌어졌다. 금세공사이자 화가인 로렌초 기베르티에게 고배를 마신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는 로마로 가서 고대 건축과 조각에 관한 연구에 몰두했다. 이들이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 작품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합리적인 성격의 고대 세계의 미술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는 마사초(1404~28)였다. 마사초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착상의 총명함과 훌륭한 구성, 자연주의 기품의 높은 수준 등은 그를 르네상스 회화에서 중추적인 인물로 만들었다. 마사초에 이어 출현한 화가들, 즉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폴라이우올로, 베로키오 등은 선과 공간을 이용한 원근법과 해부학 연구에 치중하면서 과학적 자연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피렌체의 독특한 상황은 미술의 발전에 안성맞춤이었다. 오르 산 미켈레로 알려진, 곡물거래소에 벽감(壁龕)장식으로 기베르티와 도나텔로가 제작한 도시의 수호성인(聖人)조각상과 고대에 세워진 피렌체 대성당에 브루넬레스키가 건축한 거대한 돔은 피렌체 시민들의 자랑이 되었다. 궁전과 교회, 수도원 등을 건축하고 장식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은 부유한 상인 가문들이 지불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가문이 바로 메디치가(家)였다.

 

메디치가는 유럽의 모든 주요도시를 상대로 무역을 했다. 북구 르네상스 미술의 최대 걸작품 가운데 하나인 휘고 반 데르 구스의 작품 〈포르티나리 제단화 The Portinari Altarpiece〉는 메디치가의 대리인 톰마소 포르티나리의 의뢰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이 그림은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템페라 화법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매끄러운 표면에다 보석과 같은 색감을 내는 반투명 유화물감으로 채색된 작품이다. 초기 북구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과학적인 원근구도와 해부학에 관한 연구보다는 물체와 그 물체가 지닌 상징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재생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이탈리아 중부의 화가들은 1476년 〈포르티나리 제단화〉가 피렌체에 소개된 직후 유화 물감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성기(盛期) 르네상스(High Renaissance) 시기는 1490년대 초반에서부터 로마가 제국군대에 의해 약탈당한 1527년까지 대략 35년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미술은 3명의 위대한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에 의해 꽃을 피웠다. 이들은 각자 이 시기의 중요한 양상을 작품으로 구체화시켰는데, 특히 다 빈치는 바로 르네상스인(人) 그 자체였으며 외따로 우뚝 솟은 천재였다. 그는 어떠한 연구분야도 낯설게 여기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인체의 감동적인 표현을 위한 궁극적인 수단으로, 그 인체에 관한 영감을 끄집어내는 거대한 계획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창조적인 힘을 마음껏 발산했다. 라파엘로는 고전적인 정신, 즉 조화와 미, 잔잔함 등을 완벽하게 표현한 작품들을 그려냈다.

 

다 빈치는 당시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해부학을 비롯해 비행(飛行)의 성질, 동·식물 생명체의 구조에 대한 쉴새없는 연구 때문에 그림 그리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했다. 그의 명성은 몇 점의 뛰어난 작품들에서 비롯하는데 〈모나리자 Mona Lisa〉(1503~05, 루브르 박물관 소장), 〈암굴의 성모〉(1485경, 루브르 박물관 소장), 심하게 손상된 프레스코 〈최후의 만찬〉(1495~98,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소장)이 특히 유명하다.

 

〈피에타〉(1499, 로마 성베드로 대성당)·〈다비드〉(1501~04, 피렌체 아카데미아 소장)와 같은 미켈란젤로의 초기 조각품들은 더욱 풍부한 표현력을 발휘하기 위해 구조와 비례의 일반적인 규칙들을 어기면서 조화를 이루어내는 배치를 완성, 숨막힐 듯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무엇보다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의 최고 역작은 로마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규모 천장 프레스코이다. 이 천장화는 1508~12년의 4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新)플라톤 사상을 융합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철학적으로 통일된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라파엘로의 대표작 〈아테네 학당〉(1508~11)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던 것과 같은 시기에 바티칸에서 제작된 작품이다. 대규모 프레스코인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와 플라톤 학파의 사상적 대표자들을 함께 담았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화면구도가 빽빽히 차 있고 표면이 거친 반면 라파엘로는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을 아치가 있는 넓은 회당에 위치시켜 멀리 물러나 있도록 한 구도를 취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본래 다 빈치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 빈치의 〈암굴의 성모〉에 나타난 피라미드식 구성과 미모의 얼굴생김새를 자신의 성모마리아 그림들에 구현시켰다. 그러나 그는 많은 수의 작품과 침착한 기질, 고전적 조화와 확실성을 선호하는 성향 등으로 다 빈치와는 구별된다.

 

성기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는 도나토 브라만테(1444~1514)이다. 그는 1499년 55세 때 로마에 왔다. 로마에서 제작한 최초의 걸작품인, 산피에트로인몬토리오 교회에 있는 템피에토(1502)는 고대 신전건축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중앙집중식 돔 구조물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1503~13 재위)는 브라만테를 교황청 건축가로 임명하고 4세기에 세워진 성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개축하는 계획을 그와 함께 구상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브라만테가 죽은 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마무리되었다.

 

성기 르네상스의 강력한 교황들인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치하에서 인문주의 연구가 계속 진행되었으며 이와 함께 다성(多聲)음악이 발달했다.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에 봉사하던 시스티나 예배당의 성가대는 이탈리아 전역과 북유럽에서 모인 음악가·성악가들로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작곡가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조스켕 데 프레(1445~1521), 팔레스트리나(1525~84)가 있다.

통일된 역사의 한 기간으로서의 르네상스 시기는 1527년 로마의 몰락으로 끝났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전 인문주의 사이의 팽팽한 긴장은 16세기 후반 마니에리스모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으로 생기를 얻은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북유럽에서 계속 탄생했다.

 

형식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던 코레조(1494~1534)와 티치아노(1488/90~1576)와 같은 북부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외형상으로 감정의 혼란 없이 비너스와 성모마리아를 동시에 찬미하곤 했다. 안토넬로 다 메시나에 의해 북부 이탈리아에 도입된 유화기법은 습한 기후 때문에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의 화가들에 의해 빠르게 수용되었는데 이러한 유화기법은 다혈질에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베네치아인들의 문화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조반니 벨리니, 조르조네,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와 같은 화가들은 베네치아의 회화양식을 계속 발전시켜나갔다. 베네치아의 회화 스타일은 세속적인 내용의 주제, 관능적인 색감과 표면처리, 그리고 화려한 배경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지적인 분위기에 가깝게 근접한 15세기의 인물은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이다. 뒤러는 시각적인 실험과 자연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해나갔으며 동판화와 목판화를 이용해, 르네상스와 북구의 고딕양식을 박력있게 융합시켜 서구세계에 확산시킨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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