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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 ( 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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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

 

진지하고 고귀한 에우제니오 4세(1431~1447)의 뒤를 이은 르네상스 시기의 교황들은 물론 발칸 반도로부터

서구 전체를 위협하는 터어키인을 공동으로 방어하기 위해 다시 한번 유럽을 결속시키려고 노력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노력은 무익하였고, 믿으려 들지도 않았으며 교황직 자체가 점점 그의 보편적 사명을 상실하였고,

교황령과 더불어 순 小 국가적 지방정치 정책으로 전략한 때문이었다. 인노첸시오 8세나 알렉산델 6세같은

이들은 '베드로 세습령'을 다만 그들의 사유영지로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그들의 친척들에게 넘겨 주려 하였다.

교황들의 족벌주의와 친족정치는 이러한 배경을 갖고 종교개혁에 이르기까지 무서운 역활을 하였다.

이러한 불행한 인물들 중에 바오로 3세(1534~1549)와 광신적인 개혁 교황 바오로 4세(1555~1559)까지도 속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反 황제적 교황령 정책으로서 종교개혁을 크게 후원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르네상스, 즉 문예부흥기 교황들의 소극주의적 자세가 그들로 하여금 본연의 보편

교회적 임무인 교회개혁에, 적시에 또한 강력하게 종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교황령에 대한 걱정, 로마를 예술품으로 장식하고 인문주의와 예술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은 일반적인 '교회의 문화창조력'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 시각에서 다름아닌

지방 영주적인 공명심이었고, 그러므로 보편교회에 대한 배신이었다.

사람들은 문예부흥기의 교황들이 로마에서 이룩한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경탄할지 모른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교회의 사명에 비추어 볼 때, 그것들은 다른 관점에서 결코 그들의 거절과 비길만 한 것이 못된다.

여기서 문제는 첫째로 이 시기의 몇몇 교황의 윤리적 배신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최고 직무의 종교적

보편교회적 임무에 대한 그들의 근본적 자세이다. 그 책임은 역시 교황을 선출한 추기경단에게도 있다.

그러나 교황들이 다시 추기경을 임명하였으므로 책임은 결국 교황에게 돌아간다.

 

니콜라오 5세(1447~1455)와 더불어 르네상스가 로마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사적으로는 나무랄데 없었고, 기품이 있고 학식이 있는 인문주의자요 바티칸 도서관의 설립자였다.

그는 터어키인에 대해 방어전선을 구축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갈리스트 3세(1455~1458)도 터어키인에 대항할 십자군을 일으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77세의 교황은 그의 친족, 즉 스페인계 보르지아 가문에 대한 분별없는 사랑 때문에 두 조카를

추기경에 임명하게 되었는데, 후에 알렉산델 6세가 된, 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데리고 보르지아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비오 2세(1458~1464)는 당시의 가장 유명한 인문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40세에 이르기까지 그는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궁정에서 비서로서 인문주의자들처럼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후 개과천선하고 신부가 되었고 트리엔트의 주교가 되었으며 마침내 교황이 되었다.

교회를 개혁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의 과거를 비난하였을 때, 그는 그의 '철회 대칙서'에서

그의 지난날의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며, "에네아를 배척하고 비오를 받아들여라"고 간청하였다.

그런나 터어키인이 위급사태로 그의 개혁안은 성취되지 못했다. 

그는 바오로 2세(1464~1471)와 마찬가지로 족벌등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란치스꼬회의 총장을 지낸 식스토 4세(1471~1484)는 교황이 되어 그의 회에 많은 특전을 주었고,

족벌주의를 제도로서 교회행정에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터지는 암종처럼 족벌주의는 중세와 근세의 교회역사에서 지속되었다.

1692년 인노첸시오 12세의 근본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또 다른 형식에서 근대까지(비오 12세) 지속되었다.

그것은 르네상스기의 교황들에게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고, 미구에 교황령을 그들의 조카나 아들들에게

봉토로 주었을 뿐더러 그것을 교황령에서 분리하여 독립된 군주령으로 그들에게 주려고 하였다(알렉산델 6세, 바오로 3세).

 

이런 일은 식스토 4세가 그의 두 조카, 즉 후에 교황 율리오 2세가 된, 사치를 좋아하고 완전히 세속적인

로베레의 줄리아노 및 도덕적으로 절제없는 프란치스꼬회원 베드로 리아리오(1474)를

추기경단에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역시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이오에게 이물라를 군주령으로 줌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는 야심적이고 권세에 굶주리고 비양심적인 인간 리아리오로 하여금 위험하고 도덕적으로 배척되어야 할

정치거래에 관여하게 하였다 -1478년 피렌체의 메디치家에 대한 파찌의 음모, 피렌체, 나폴리, 베네치아와의 전쟁)- 

식스티나 성당의 건립자인 그는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

 

인노첸시오 8세(1484~1492)가 그때 완전히 속화된 추기경단에 의해 선출되었다.

교황청 행정의 부패, 교회개혁에 대한 몰이해, 신부가 되기전에 생긴 그의 두 사생아에 대한 배려 등은

그의 교황직을 특징지운 것이다. 그는 자기 아들과 메디치가의 로렌조의 딸과의 결혼식을 바티칸에서

아주 성대하게 거행하였고, 겨우 13세 된 로렌조의 아들, 메디치가의 지오반니를 추기경으로 임명하엿다.

이 사람이 후에 교황 레오 10세(1513~1521)가 되었는데, 그는 1517년 루터의 논제를 '수도자의 언쟁'으로 처리하였고

 '하느님이 그에게 주신 교황직을 향유'하려 했다.

 

알렉산델 6세(1492~1503)는 교황직의 절대적 최하점을 나타냈다.

완전히 속화된 추기경단의 철면피한 성직매매 책동으로 선출된 그는, 역시 철면피하게 그의 교황직을 악용하였고,

그래서 벌써 동시대인들이. 그는 도대체 그리스도인이 아니고'복면한 가면신자' 생각까지 갖게끔 되었다.

그가 모든 것을 그의 정치적 목표와 그의 끝없는 족벌주의에 종속키켰고 또한 그의 부도덕한 생활을 지속시켰다.

그는 그의 사생아들에게  군주령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 지위를 이용하였다.

 

장남인 뻬드로 루이스 보르지아(1458~1488)는 이미1485년에 간디아의 공작이 되었고 그가 죽자,

1474년에 출생한 쥬안 보르지아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악평이 자자했던 셋째 체사레 보르지아(1475~1507)는

이미 7세에 교황청 비서실장, 16세에 팜프로나의 주교, 17세에 발렌치아의 대주교, 18세에 추기경이 되었으니

사제품이나 주교품을 받은 적이 없고, 다만 次 부제품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가 추기경직을 포기했을 때,

1498년 次 부제직에서 면제 되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방자하였고, 또한 정치적 야심에 충동되어 폭력, 책략, 음모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중부 이탈리아에 왕국을 강탈하기 위한 목표를 추구하였다.

1498년 이래 완전히 체사레의 세력 및에 들어간 교황은 이를 위해 모든 협력을 제공하였다.

 "부당하게 르네상스기의 도덕적 타락의 결정結晶이 되어버린 알렉산델 6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480~1519)는

그의 아버지의 혼인정치의 희생이 되었다. 그녀는 두번의 불행한 결혼을 거쳐 1501년 페라라의 알퐁스 데스테와 결혼하고, 그와 행복하게,
또한 죽을 때까지 프란치스꼬회의 제3회 회원으로서 자선을 행하며 열심히 살았다.

알렉산델 6세의 막내 아들 죠프레 보르지아(1481~1553)는 나폴리의 알퐁소 2세 왕의 사생아와 결혼 함으로써

스퀼라체의 영주가 되었다.

 

율리오 2세. 불행히도 알렉산델 6세는 그의 생활을 개선하지 않았다.

그의 뒤를 이어 겨우 23일간 비오 3세(1503)가 막간으로 등장한 후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율리오 2세(1503~1513)가

교황이 되었다. 다시 성직매매, 정치, 폭력이 교황직을 지배하였다.

비록 율리오에게 족벌주의와 부도덕한 행위는 없었을지라도, 그의 전 재위 기간 중 유일한 목적은

로마와 교황청을 확장하고, 미화하고, 자신의 명성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로 하여금 그의 묘자를 고안하게 하고, 모세의 위대한 모습에서 구체화하게 하였다. 그

는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루터는 1520년 그를 '흡혈귀 율리오'라고 표현하였다.

브라만테는 그를 위해 세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하였고(1506),

미켈란젤로는 식스티나 성당 천정 그림을, 라파엘은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렸다.

르네상스 예술이 그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도 임박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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