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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 ( 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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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와 인문주의

 

에라스무스는 1469년경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와 의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고, 데펜터의 유명한 인문주의 학교에서 우수한 교육을 받았으며(1474~1484), '공주생활 형제회[에서 데보시오 모테르나(근대 신심운동)를 배웠다. 1486년 엠마우스의 아우구스티노 수도참사회에 입회하였고, 1492년 사제가 되었다. 감브라이의 주교 비서로(1493~1495)서 또 파리에서 공부할 때(1495~1499), 열심히 인문주의 공부에 몰두하였다. 후에 그는 모국어보다 고전 라틴어를 더 잘하게 되었다. 일련의 라틴어 실습교본과 문법서들은 그가 인문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든 데 기초가 되었고, 또한 라틴어를 학자어로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그는 영국에서(1499~1500) 한 경건한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와 지면을 맺었고 또한 그를 통해 토마스 모어, 죤 퍼셔(둘 다 성인), 존 콜레트를 알게 되었으며 콜레트와는 특히 친하게 지냈다. 이 사람들로부터 그는 성서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습득하고, 1516년 희랍어 신약성서의 비판서를 발간하였는데, 그것으로 인해 그는 일약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와 성서주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는 서론으로 상세한 신약성서 입문을 두어, 거기서 완전히 성서적인 교회와 신학의 개혁사상을 제시하였다.

 

그는 이미 그의 '그리스도 병사의 소교본(1503)'과 '미련함의 찬미(1509),에서 교회와 신앙생활의 폐해를 신랄한 풍자로 비판했었다. 이제 그는 그의 신약성서 입문에서 산상강론에 입각한 그리스도교적 생활관, 즉 그의 '그리스도의 철학'을 전개하였다. 복음의 순박한 정신이 지배적이어야 하고, 교회전통 중 무익한 것은 폐지되어야 한다. "폐해는 제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소가 침해되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그의 표어였다.

 

이와같은 주장으로 그는 시대의 문제를 파악하였고, 개혁을 복음과 연결시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렇게 오래동안 열망한 개혁을 일으킬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일까? 인문주의자들이 그에게 환호하였다. 온 세계가 그의 말을 들으려 했다. 원천으로부터, 다시말해서 성서와 그리고 단순하고 순수한 성서신학에 입각하여 전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올바로 개혁한다는 그의 원칙들은 바로 일반적인 열망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의 실질적인 개혁안은 열광적인 찬성을 얻었다.

 

바로 이때 마르틴 루터가 등장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라이프찌히 종교토론회 이후 비로소 루터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루터를 같은 인문주의자로 여기고, 그를 격려하였다. 곧 루터의 운명이 그의 수중에 들어갔다.그는 1520년 11월 루터의 지방 영주,  프리드리히 현자(賢者)와 쾰른에서 회합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루터에 관해 에라스무스의 희견을 들었고, 에라스무스는 이 선제후에게 루터를 중재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곧 요란스럽고 격렬한 비덴베르크의 수도자와 헤어지게 되었다.

 

자연에서 善을 인정하고 '정신의 자유'에서 모든 인간교육과 모든 참된 신심에 필요한 전제를 인정하였던, 인문주의적 낙관론자인 이 민감한 학자는 자연과 이성에 대한 루터의 유명론적 회의론을 간파하였다. 그는 그의 저서, '자유의지론(1524)에서 이 점에 대해 비판을 시도하였다. 루터는 즉시 '반자유의지론, 1525)이란 반박서로써 아주 격렬하게 응수하였다. 후에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그의 반대자 중에서 자기 주장의 핵심을 바로 파악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에라스무스는 다시한번 루터를 반대하는 글을 썼다(1526~1527). 그때부터 그는 루터에 대해 아주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대부분의 옛 인문주의자들도 그를 따랐다.

 

에라스무스는 1521년 이래 바젤에 거처하면서 교부들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1529년 종교개혁이 바젤에 강제로 도입되자 그는 거기서 브리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로 피신하였다. 여기서 그는 아욱스부르크 제국의회(1530)의 담판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였다. 그는 평화를 재촉하여 마지 않았다. 새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폭력적인 취급도 그는 거부하였다. 그는 종교전쟁을 발발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루터 운동을 관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우리는 루터와 다른 광신자들을 고립시키고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우애와 지식이 일치의 길을 되찾게 해 줄지 모른다. "정신의 자유를 통한 참된 신심으로" 이것이 그의 표어였다. 지식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종교와 올바른 신심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무지와 비교양이 항상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따라서 참을성 없고 광신적이고 투쟁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혁신자들의 시끄럽고 광신적이고 방약무인한 행동은 그가 협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톨릭 진영에서 낡은 전통을 편협하고 완고하게 고집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경고하였다. 그는 양극단에서 중도를 추구하였다.

 

에라스무스는 1536년 바젤에서 사망했다. 그는 죽기 직전 그곳으로 돌아왔었다. 그의 최후의 저술들은 재일치를 위한 것이었다.(교회의 재 화목에 대하여, 1533) 이 저술을 통해 이른바 조정신학(調停新學)의 기초를 놓았는데, 특히 가톨릭 진영에서 오래동안 그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도 멜란히톤과 부쩌 같은 사람들에 의해 장려되었다. 특히 저지低地 라인 지방같은 여러 지방에서 '에라스무스주의'는 오래 영향을 미쳤고, 마침내 60년대에 이르러, 그 사이 경화된 종파집단에 의해 분쇄되기까지 그것은 가톨릭과 루터파의 평화적 공존을 실현하였다.

 

에라스무스적, 인문주의적 중재 시도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그 판단이 상반되고 있다. 어떤이들은 에라스무스에게서 종파투쟁의 '제3세력'을 보고, 그것이 실현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떤이들은 그가 신학의 위치를 혼란시키고, 그의 불확실성을 갖고 가톨릭교회 특히, 그  신조에 큰 손해를 입혔다고 비난하고 있다. 어떤이들은 "바로 에라스무스가 올바른 길을 걸었다"고 믿고 있다.  최근에 와서는 그리스도교적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는 비교리적 회의론자도, 자유사상가도 아니고 오히려 신앙심이 깊고, 제시에 근거하고 교회에 충실한 가톨릭 신자이고 신학자였다는 사실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이마지막 평가는 도외시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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