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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쯔빙글리와 재세례파( 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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쯔빙글리와 재세례파

 

쯔빙글리는 1484년 토켄부르크에서 출행하여 성직자인 그의 백부가 거처하던 베에전의 신부댁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494년까지 바젤파 베른의 학교에 다녔고, 다음 비인에서 공부하였고(1498~1502) 거기서 '구방법=스콜라학파'을 배웠으며 끝으로 바젤의 인문주의 학교에서(1502~1506) 그의 공부를 마쳤다. 그는 바젤의 인문주의자들과 항상 친밀히 사귀었고, 그들과 더불어 에라스무스에게서 그의 인문주의적 숭배 대상을 찾았다. 1506년 콘스탄쯔에서 신부가 되었고, 글라루스의 본당신부(1506~1516)와 아인지델른의 사목사제(1516~1518)를 역임하였고, 그간 교황을 위한 상부 이탈리아의 전투에 군종신부로서 스위스 용병들을 두 차례 동반하였고, 그로 인해 교황청의 연금을 타게 되었다.

 

자신이 고백한 바에 의하면 그는 아인지벨른에서 여자와 불륜한 생활을 하였다. 죽음의 위험에서(페스트) 구제된 것과 , 1519년 취리히 대성당의 공주성직자단의 신부들과는 달리 그곳의 주임사제란 새 직책을 맡게 된 것이 그를 종교적,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 개방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

 

'성서주의'는 '새 유행'이었다. 유행을 따르려는  취리히 시의회는 그를 채용함에 있어서 그에게 성서에 적합한 설교를 할 임무를 주었다. 그는 인문주의자로서 이 요구에 기꺼이 응하였고 그리하여 그는 성서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1522년까지 그의 성서주해은 완전히 에라스무스적 조짐을 보였다. 그는 또한 에라스무스로부터 그의 개혁 이념을 빌려 왔다. 라이프찌히 종교토론이 있은(1519) 후 그는 처음으로 루터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에게 미친 루터의 신학적 영향은 근소한 것이었다. 그는 인문주의자였고, 인문주의자로 머물렀다. 1522년 그의 등장과 함께 제시된 그의 개혁안은 루터에게서처럼 깊은 개인적, 종교적 투쟁과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고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재계 규정과 사제의 독신제를 반대하였다. 그는 벌써 오래전부터 부유한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고 1524년 그녀와 공공연하게 결혼하였다.

 

콘스탄쯔의 교구청이 그를 고발했을 때 쯔빙글리는 그렇지 않아도 주교와의 관계로 긴장되어 있었던 시의회로 하여금 자기를 지지하게 할 줄을 알았다.  시의회는 공개 토론회를 기획하였고,거기서 쯔빙글리가 '수도자들', 즉 구신앙인들과 성서원칙, 성화상 공경, 미사에 관해 토론하기로 되었다. 성서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만이 유효하기로 되었다. 시의회는 결정권을 자기 권리로 보류하였다. 1523년 10월에 토론이 있은 후 시장 마르코스 뢰이스트는 체념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도자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의견입니다. 즉 너희는 이제 다름아닌 성서 즉, 거룩한 복음과 성 바울로와 예언자들을 설교해야 하며, 스코투스와 토마스 - 스콜라학파의 대표자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치워버려야 합니다."

 

시의회가 '성서에 부합한 설교를, 우선 전통적인 의미만으로, 즉 하느님의 말씀에서의 설교를 생각하였다면, 쯔빙글리는 이제 성서원칙을 또한 개혁과 관련하여 새로이 해석하였다. 생활 전체가 성서적인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쯔빙글리는 그의 '최후의 연설'과 그의 '그리스도교 개론'(1523)에서 급진적인 개혁안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모든 예식과 축성의 폐지, 성당 성화상의 제거, 미사의 폐지, 수도회의 해산, 교회 성직록의 개편 -이것은 완전히 시의회에 일임되었다 - 시립 혼인재판소의 설치였는데, 이것은 먼저 주교의 혼인 재판권을, 다음 전 재치권을 넘겨 받게 되었다.

 

쯔빙글리가 1523년 12월에 미사 대신에 루터파의 성찬식을 도입하려 하였을 때, 시의회는 주저하며 중지를 명하였다. 제2차 토론회 이후 시에서는 파동이 높게 일고 있었다. 뿐더러 외부로부터의 저항이 있었다. 1524년 1월 26일 남은 12개의 동맹주들은 가톨릭 신앙에 대한 모든 침범을 막기로 합의 하였다. 이 결의는 그 개혁열로 인해 의혹을 일으켰던 취리히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의회는 우선 더 이상의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다.

 

쯔빙글리가 시의회의 지시를 따랐을 때, 그는 그의 신봉자들 중의 과격한 그룹으로부터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를 복음의 배신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가 내디딘 길을 타협함이 없이 계속하기를 요구하였고, 시 당국은 이 문제에 대해 하등의 결정권이 없다고 말하였다.

 

다음은 유아세례 문제로 쯔빙글리와 그의 신봉자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났다. 특히 쯔빙글리의 열렬한 친구들인 과격파들은 '다만 신앙에서' 란 종교개혁적 의화관의 당연한 결과로서 유아들이 아직 신앙을 가질 수 없는 한에서 그 세례가 거짓이고 무익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상은 원시 그리스도교적 '성인들의 공동체'의 완전한 복구였는데, 이 공동체는 다만 신앙의 자발적인 수락을 통해서만 받아 들여질 수 있었다. 그들은 우선 새로 태어난 그들의 자녀들에게, 그들이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을 때까지 세례를 주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은 모든이에게 은총을 인정하지 않고, '재세례'의 필요성을 선고하였다.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쫄리콘에서는 성당의 세례반이 파괴되었다. 쯔빙글리는 유아세례를 고수하였으므로 공격을 받았다. 이때 그는 시의회로 하여금 이 일에 간섭하게 할 수 있었다. 시의회는 아직 세례받지 않은 아이들에게 즉시 세례를 주도록 명하고, '재세례파'의 집회를 금지하였다. 이들은 박해로 힘을 얻어 광신적인 선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들은 성령의 조명을 받은 자로 자처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로서 홀로 성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재세레파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투옥되는 사람의 수와 추방되는 사람의 수가 가 점점 늘었다.

 

그러는 동안 쯔빙글리는 시희회에 점점 더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시의회로 하여금 완전히 자기 노선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1525년 4월 당국에 의해 미사가 페지되었고, 신조와 단절하게 되었다. 반면 쯔빙글리와 루터의 일치는  성체문제로 좌절되었다. 쯔빙글리에 있어서 성찬식은 다만 주님의 속죄적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순 기념적 예식이었다. 그러나 루터는 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實在)를 열렬히 고수하였다 -그러나 가톨릭의 전질변화는 부인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길은 갈라지게 되었고 루터는 쯔빙글리를 늘 미워하고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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