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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가톨릭 일반상식과 간단한 교리를 담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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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레판토 해전 ( 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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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배경


1.1.신성동맹 함대의 규모 ¶
* 참전 지휘관이 많기에 대표적인 지휘관만 기록했다.

* 총사령관 :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중앙 갤리선 62척)
* 지휘관 :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우익 갤리선 53척), 돈 알바로 데 바잔(예비 선단 갤리선 30척), 아고스티노 바바리고(좌익 갤리선 57척)
* 총병력 : 갤리선 206척, 베네치아 갈레아스 6척 (선원 40,000명 ; 전투원 30,000명)
* 참여국가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 왕국 - 갤리선 80척
베네치아 공화국 - 갤리선 105척, 베네치안 갤리어스 6척
교황령- 갤리선 12척
제노바 공화국 - 갤리선 3척
몰타 기사단- 갤리선 3척
사보이 공국 - 갤리선 3척


1.2.오스만 함대의 규모 ¶
* 총사령관 : 무에진자데 알리 파샤[6]
* 지휘관 : 울루치 알리, 모하메드 시로코(모하메드 샤르크), 투르굿 레이스, 페르테브 파샤, 카라 호자, 하산 레이스, 메흐메트 베이[7]
* 총병력 : 갤리선 220척, 갤리엇[8] 60척, 푸스타[9] 64척 (선원 50,000명 ; 전투원 27,000명)

2.전개 ¶
3.결과 ¶
4.의의 ¶


반면 오스만 제국은 튀니지를 탈환하고 해군의 규모 자체는 [17]수복하여 체면치레는 했지만, 이후 막장 술탄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레판토 해전 자체의 의미가 덧칠된다. 레판토 해전과는 별개로 막장 술탄들의 실정으로 오스만 제국이 점차 침체하지만, 기독교 세계의 선전으로 마치 레판토 해전 패전 이후 오스만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려진 것이다. 사실과는 전혀 다르며, 오스만의 진정한 쇠퇴는 레판토 패전 후 무려 110년이나 지난 2차 빈 포위(1683)의 실패 이후 오스트리아-폴란드-베네치아-러시아가 뭉친 '신성동맹'시즌 투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뒤부터 시작된다.


5.그 외 참고할 이야기 ¶
* 636년 야르무크 전투이후로 기독교측이 이슬람측에 레판토 해전 시점까지 늘 수세에 몰려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무리한 해석이다. 확실히 그때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서유럽이든 동유럽이든 기독교측이 이슬람측에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심지어는 과학기술적인 면에서 열세였던 것은 사실이나, 이 시기가 넘어가면 동유럽 쪽에서는 7~9세기의 과정을 거치며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인 체제 정비를 완료한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측에 분명한 공세를 퍼붓기 시작한다.

흔히 "공격적인 방어"를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든 면에서 불필요한 짓을 혐오했던 바실리우스 2세의 성향[19]이지, 군사적인 영광을 꿈꾸며 옛 로마에 대한 향수가 있었던 그 이전의 대다수 황제들에게까지 함부로 일반화시킬 수 없는 얘기다. 이 시기에 몇몇 황제들이 나름 대로는 꽤 좋은 조건으로 테마병들의 군역을 면제해주려다가 거꾸로 군사 폭동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유는 이들이 풍요로운 이슬람 지역에 쳐들어가서 마음껏 약탈하게 되는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는 것으로 여긴 데 있었을 정도였다. 사실 "공격적인 방어"로 이름난 바실리우스 2세도, 시칠리아의 이슬람 세력은 반드시 생전에 근절해야겠다는 분명한 플랜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기 전에 죽긴 했지만


* 기독교 측은 당시에 유명한 해군 지휘관인 마르코안토니오 콜론나, 아스카니오 델라 코르나, 마르코 퀘리니, 마뤼탱 로메가스 등 참전하였는데, 콜론나의 기함에 탑승한 로메가스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배를 지휘했다.

* 이슬람 측은 벡타시 무스타파, 델리 첼레비, 하지 아가, 코스 알리, 피알리 오스만, 카라 레이스 등 여러 명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이 전투에 돈키호테의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이 전쟁에서 마르케사 호에 승선해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으면서도 보병 부대를 지휘했으며, 하사관인 마르틴 무뇨스도 시칠리아의 함선인 산조반니호에 탑승해 참전했지만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았다.

*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 중에 세르반테스는 결국 이 전쟁으로 왼손을 잃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스페인으로 귀국 도중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돈세야 호의 페데리코 베누스타는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려 팔이 불구가 되면서 왼 팔을 잘라 의수를 단 채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구호기사단의 기사인 로메가스는 몰타 섬의 갤리선들이 아닌 콜론나의 기함에서 승선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구호기사단의 부단장인 피에트로 주스티아니는 화살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 영국 국왕인 헨리 8세의 서자일 가능성이 있는 해적이자 용병인 토머스 스투켈리가 에스파냐 함선 3척을 지휘하였으며, 파마구스타 공방전에서 사망한 베네치아 사령관인 마르칸토니오 브라가딘의 일가인 안토니오 브라가딘, 암브로조 브라가딘 등이 선두에 서서 갈리아스선 2척을 지휘했다.

* 아내 살해 혐의로 12년간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한 피렌체의 음악가인 아우렐리오 셰티가 참전했으며, 총사령관 돈 후안의 기함에 애인을 따라 나선 마리아 라 바일라도라라는 여성이 남장을 하고 화승총병으로 참전했다.

* 알리 파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만 해군의 깃발이 노획되어 베네치아의 해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야 터키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교화해의 증거로 반환되었다. 흰 천에 금실로 쿠란의 경구를 자수한 군기라고 하는데, 현재 터키에서는 패한 전투의 깃발이라 그런지 공개하고 있지 않다. 그걸 가지고 시오노 나나미가 그 깃발 멋있는데 니들 땜에 이제 못보잖아라고 하면서 왜 돌려줬냐고 깠다. 이뭐병.

* 가톨릭에서는 이 해전의 승전일인 10월 7일을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하였다. 당시 교황 성 비오 5세가 신성동맹의 승리를 기원하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다.

* 이 전투 이후 오스만 해군은 이 전과 같은 정면 팽창보다 북아프리카의 가신 토후국들을 이용한 해적질에 더 무게를 두게 되고, 2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뒤흔든 이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 무역 자체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 버려 결국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의 경제적 몰락에 큰 일조를 한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자금줄 또한 지중해 무역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레판토 이후 창궐한 이 해적들 때문에 전투의 참전 세력 대부분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는걸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가 아닐까. 그 후 이 해적들은 영국 배들까지 건드렸다가 한 소리 들은 후에 영국 배에 대한 공격은 하지않기로 잠정적 합의를 맺었다. 그 후 이들은 "미국? 그게 어디있는 나라임? 우걱우걱"을 외쳐대며 미국인들을 털다가 분노한 천조의 해군과 해병대에게 장렬히 산화한다.[20] 이 때를 기점[21]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전멸해버렸으며 150년 이후 천조의 해군은 전세계의 바다를 자기네 수영장으로 삼는 희대의 먼치킨으로 거듭나게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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