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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재건 (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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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재건

 

교회의 개혁은 바야흐로 공희회 교령의 실시로 충만하게 된다. 국가와 교구 어디서나 시작된 낡은 폐해에 대한 아주 집요한 툭쟁이요, 아주 복잡한 성장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생활의 새로운 약진은 교회사상 가장 놀라운 현상에 속한다. 가톨릭 대중을 패전 군대모양 후퇴시켰던 체념은 새로운 투쟁정신과 재각성된 자아의식으로써 서서히 극복되었다. 교회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다시 그들의 신앙에 대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진정한 교회개혁가는 성인다운 카리스마를 지니는 법이다. 그러한 인간만이 무수한 인간적 비참성을 이겨내고, 그것을 하느님께 희생으로 바칠 힘을 지닌다. 참된 개혁가는  허약자의 십자가와 동료의 과실을 너그럽게 감수하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을 패배자로 만들지도 않고, 남을 파괴하지도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점에서, 거짓되고 진실하지 않은 개혁가와 구별되는 것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옛 전통을 "자주 하등의 경외심없이 마구" 대하였다. 그들이 교회를 약간의 솜씨로서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한 한에서, 그들에게는 모든 종교적 열광자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참된 역사적 센스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소의 폐해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성(聖性)과 내적 회복을 가져오지 못했다.

 

내적 개혁에 봉사하는 생활이란 일체를 단념한 짐꾼의 일처럼 고된 것이다. 깊은 종교심, 영웅적 덕행, 교회의 성성에 대한 불굴의 신앙만이 교회를 재건하려는 사람들에게 파괴가 아닌 끈기와 자제와 신중과 현명한 적응으로써 구제하고 또 헤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고 모으기 위해 필요한 힘을 줄 수 있었다. 그들은 도중에서 쓰라린 환멸과 실패, 종종 악의의 중상모략을 면할 수 없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위대한 응급구호자들이 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후기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 계층에서 다시금 수많은 위대한 성인들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즐겨 '성인들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들 배부분은 일정한 시대적 사명을 지니고 있었고, 그들은 '시대의 필요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이었다.

 

교황직

 

3백년만에 처음으로 비오 5세(1566~1572)에게서 다시 성인 교황을 만나게 된다. 이 사실은 '머리의 개혁'을 통한 교회쇄신의 진지성을 확신시키고  납득시킨 점에서 특히 중요하였다. 비오가 교황으로 선출된 것은 성 가를로 보르메오 추기경의 덕택이었다. 그는 도미니꼬 회원으로서 개혁의 열망과 더불어 기도 가운데 결합되어 성자다운 수덕생활을 계속 하였다. 그는 트리엔트 공희회 방침을 따라 전 교회를 내적으로 쇄신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교황의 과제로 간주하였다.

 

그는 추기경단의 개혁을 철저하게 시작하고, 그것을 종교적, 윤리적으로 뛰어난 사람들로 보충한 다음, 그들에게 교회 개혁사업을 완전히 책임지웠다. 그는 곧 순찰과 교회회의의 시행을 전교회에 명하였는데, 이는 개혁규정을 각 교구에 도입시키기 위해서 였다. 성직자들의 계몽을 위해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제기된 로마공교요리(公敎要理:1566)을 위시하여 새로운 로마성무일도(1568)와 로마 미사전서(1570)를 간행하였다. 교회생활의 내적 기능을 위해 엄격히 관철된 교황청의 쇄신 및 교황청직원들의 성직매매와 기타 폐해의 극복은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러므로 비오 5세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장 위대한 개혁교황으로 간주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의 최고의 승리는 레판토 해전에서 터어키(오스만 투르크)군에게 거둔 승리였는데(1571.10.7) 그것은 그의 발의(發議)로, 교황과 스페인과 베네치아 군대에 의해 쟁취될 수 있었다. 그의 후계장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식스토 5세(1585~1590), 그후의 교황들도 그의 일을 성공적으로 지속시켰다.

 

주교직

 

쇄신된 주교직은 곧 베르나의 마테오 지베르티(1543), 볼로냐의 주교 가브리엘 팔레오티(1560~1584)와 같은 훌륭한 주교들에게서 빛을 내게 되었다. 가를로는 교황 비오 4세(1559~1565)의 조카로서 이미 21세에 추기경이 되었고, 그의 백부에게 개혁의 뜻을 굳게 하였다. 그는 주교로서 바로 새로운 트리엔트적 사목주교의 전형으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교구에서 트리엔트 개혁을 강력하게 실시하였다. 그의 영향은 밀라노를 넘어 멀리 파급되었다. 밀라노 교회문서에 수록되었고, 자주 인쇄된 그의 개혁규정은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의 모든 주교들의 개혁활동을 촉진하였고, 그 표준이 되었다. 가를로 외에도 그 후기에 있어서 적어도 프랑소아 드 살(프란치스꼬 살레시오, 1567~1622) 성인의 크게 빛나는 모범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제네바의 주교(1602~1622)였으나 이 도시가  칼빈파로 넘어갔기 때문에 안네씨에 거처하였다.

 

수도회

 

종교개혁 이전에 대내외적으로 크게 동요되었던 수도회 개혁이 그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베네딕도회, 프란치스꼬회, 도미니꼬회, 아우구스티노회처럼 구 수도회들은 대부분의 15세기에서부터 깊은 개혁노력을 체험하였다. 다만 카르토지오회만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들은 중세 말기와 종교개혁 시대에 있어서도 본래의 엄격성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개혁된 구수도회 및 완전히 새로 창설된 수도회들은 -이제 일반적으로 활동하기 쉬운 수도회 형식이거나 단식서원 수도회 형식으로 창설되었다 - 대부분 교회 개혁활동의 봉사에서, 그것이 민중사목이건 성직자 양성이건 또는 교육 또는 빈민구제이건 병자간호이건 그 전적 헌신에 내적이고 영적인 생활의 쇄신을 결합시켰다. 먼저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다음 프랑스가 모범과 헌신의 중요 중심지가 되었다.

 

진정한 성인은 또한 진정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그들의 인간적 친절로 인해 정신적 불구자인 광신들과 구별되는 바, 비록 그들이 그들의 광신주의를 겉으로는 종교의 봉사로 내세울지라도 그것은 항상 악마로 말미암은 것이다. 오라토리오회 창설자(1552)요 유모어가 많고 명랑한 성 필립보 네리(1515~1595)는 매혹적인 로마의 사도였는데, 그는 이 문예부흥의 도시를 그의 새로운 사목방법으로 종교적, 윤리적으로 쇄신하는 기적을 낳았다. 그는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친구였고, 그와같이 로마에서 활약하였다. 기쁨을 억압하려던 음울하고 광신적인 바오로 4세(1555~1559) 밑에서 그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후 교황의 동의와 보호 밑에서 그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수천명이 그를 통해 다시 정신과 영혼과 육신의 건강을 회복하였다. 가톨릭 부흥이 바로크의 즐거운 생활감정에서 표현을 찾은 것은 특색이다.

 

스페인의 아빌라의 성녀 대 데레사(1582)는 그의 깊은 신비사상과 무한한 사랑으로 까르멜회를 쇄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스페인과 프랑스의 정신과 신심에도 영향을 미쳤다. 까르멜 회원 십자가의 성 요한(1591)은 그녀를 도왔다. 성녀 안젤라 메리치(1540)는 1535년 브레쉬아에 우르술라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회는 1544년 교황의 인가를 얻었고, 1582년 자선과 여자교육을 위한 여자수도회로 개편되었다. 천주의 성 요한(1550)이 설립한 경건한 평신도 단체에서 1572년 병자간호를 위한 자비의 우회(友會)가 출현하였다. 성 가를로 보로메오는 1578년 재속신부수도회인 헌신회를 설립하엿다. 렐리의 성 가밀로는 1584년 중환자와 임종자를 위한 가밀로회를 창설하였다. 상탈의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프레미오는 1610년 '마리아 방문수도회'를 세웠다. 그때 성 프랑소아 드 살(프란치스꼬 살레시오 1622)이 이 회를 도왔고, 그후 그의 이름을 따라 살레시오 수녀로 불리게 되었다. 병자 간호와 여자 교육이 그들의 과제였다.

 

프랑스에서 베드로 베퀼(1629)은 1611년 프랑스의 오라토리오회를 창설하였는데, 특히 성직자 교육에 헌신하였다. 17세기 프랑스의 영성에 미친 베퀼의 영향은 최근의 연구가 증명하는 것과 같이 비상한 것이었다. '프랑스 학파'는 그가 창설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탁신 신비로 각인된 영성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아주 특수한 사제양성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 학파로서 배퀼은 프랑스 성직자의 내적 쇄신의 기초를 마련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전 가톨릭 개혁에 고유한 엑센트를 부여하였다. 프랑스 학파는 프랑스 성직자에게 높은 정신문화과 뛰어난 신학교육을 부여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쌩 슐피스 신학교는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신학 교육기관의 하나로서 프랑스의 모든 신학교의 정형이요 본보기가 되었고, 영국과 미국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끝으로 성 요한 에우드(1680)에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는 1643년 오라토리오회에서 나와 독립된 재속신부 수도회를 창설하였고, 또한 신학교를 세웠다. 그 역시 17세기의 프랑스의 종교생활을 크게 쇄신한 사람의 하나였다.

 

사제신분에 관한 배려는 프랑스를 위해 아주 효과가 많았던 것이 판명되었다. 프랑스에서 17,8세기에 있어서 정신적 지도력의 향상은 쇄신된 교회적, 종교적 정신에 의한 것이었다. 새 성직자들은 동시에 민중의 그 모든 영육간의 곤궁을 돌보아 준 열렬한 사목자였다. 요한 에우드 및 '에우드 회원'들이 사제양성 외에 열성을 다해 민중묵상 지도에 전념하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적 이웃 사랑의 가장 위대한 성인인 뱅상 드 뽈(빈첸시오 아 바오로(1660)도 그러하였다. 그는 루이즈 로그라와 같이 1633년 자비수녀회를 창설하였는데, 이 회는 그후 빈첸시오 수녀회로 불리게 되었고, 1688년 교황으로부터 인가되었다. 이 회는 빈민구호와 병자간호에 종사하였다.

 

또한 17세기 중엽에 엄격한 트라피스트회가 탄생하였다. 이 회는 1644년 시토회의 원장, 아르망 장 르 부틸리에 드 랑세(1700)에 의해 창설되었다. 1652년 낭씨에서 보로메오 수녀회가 탄생하였는데, 그것은 두명의 쇼브넬이 의지할 때 없는 병자들의 간호를 목적으로 '재속 단체'로 설립한 것이었다. 끝으로 1681년 요한 드 라 살(1791)에 의해 그리스도교 교직회가 창설되었다.

 

이렇듯 기라성같은 위대한 성인들, 수도회의 창설, 자선사업, 교육사업은 이 시기의 참된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미 16세기에 많은 이들이 전멸된 것으로 생각했던 가톨릭 생활은 그들에게서 다시 각성되어 놀라운 새 전성기를 낳게 하였다.

 

그러나 아주 주요한 수도회가 또 있다. 그 창설자인 이냐시오 로욜라와 그의 예수회에 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그것을 따로 다루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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