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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가톨릭 일반상식과 간단한 교리를 담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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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교황 ( 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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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호칭의 어원[편집]

한국에서 ‘교황’(敎皇)이라고 번역되는 라틴어 ‘파파’(papa)는 본래 그리스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단어 ‘파파스’(πάππας)에서 유래한 것이다. 초대 교회 시절부터 이 칭호는 모든 주교, 특히 동방 지역 주교들과 기타 고위 성직자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는데, 나중에 서방으로 전파되면서 로마의 주교도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직 로마의 주교만이 사용하게 되었다.[7][8][9][10][11] 역사적으로 이 칭호를 가장 먼저 사용한 이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헤라클라스[12] 파파를 한국어로 옮긴 호칭인 교황은 본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감화시킨다’는 의미의 ‘교화황’(敎化皇)이었는데, 이는 1614년 이수광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마테오 리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로마 미사 경본제2차 바티칸 공의회[13]

파파라는 칭호는 3세기부터 모든 주교에게 공통적으로 사용한 호칭이었으나,[14] 6세기부터 특별히 로마의 주교에게 사용하기 시작했고, 11세기 말엽 교황 그레고리오 7세[14] 6세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재한 동로마 제국 상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였다.[14]

초기 기독교 시대 (c. 30–325)[편집]

피에트로 페루지노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받는 성 베드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15][16] 이러한 약속은 베드로가 배신한 후에도 부활한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나타나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세 번이나 당부한 것으로 계속 이어졌다(요한 21,15-17). 교황은 바로 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다. 베드로는 비록 한 번도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적이 없었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를 초대 교황으로 여기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단지 ‘교황’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교황으로서의 직책을 맡아 사목 활동을 수행했기 때문이다.[17]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사도단 안에서 베드로가 지녔던 위치와 같이 교황 역시 주교단 안에서 같은 위치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즉 주교들 가운데서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로서 별개의 독립적인 주교로 존재한다는 것이다.[18][19][20] 교황은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지만 교회의 최고 목자의 자격으로 단독적으로도 장엄 교도권을 사용할 수 있다. 베드로는 선교를 위해 로마로 갔다가 64년 네로

필리피노 리피성 베드로의 십자가형.

1세기 이래(30–130) 베드로의 주교좌였던 로마는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받아들여졌으며, 다른 곳과 비교하여 이례적으로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교황의 수위권은 초대 교회 때부터 이미 각 지역 교회들에 의해 공인되었다. 그 중 중요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95년경 코린토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을 때, 제4대 교황 클레멘스 1세빅토르 1세는 소아시아 교회에 부활절제피리노몬타누스갈리스토 1세

189년 교부 이레네오는 저서 《이단 논박[21]

초세기의 교황들은 기독교의 기틀을 다지고 발전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초대 교회 때에 일어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가 교황들에게까지 미쳐 베드로를 시작으로 고르넬리오, 루치오 1세, 식스토 2세멜키아데 때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밀라노 칙령[22] 이로써 기독교에 평화로운 시기가 도래하였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 ~ 동서 교회의 분열 (325–1054)[편집]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을 묘사한 부조.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어 아리우스주의를 단죄하고 삼위일체로마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주교좌[23] 교황들은 모두 삼위일체 신앙의 강력한 지지자였는데, 특별히 교황 리베리오는 삼위일체 신앙을 고수하며 변호했다는 죄로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에 의해 베리아테오도시우스 대제[24] 동방에서는 세속 권력이 교회보다 위에 있었던 반면에[25] 서방에서는 교황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강화해나갔다. 교황직의 위신이 높아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교황 레오 1세훈족아틸라가이세리크가 이끈 반달족서로마 제국[26] 프랑크 왕국클로비스 1세서고트족[26]

이러한 동방과 서방의 교회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1045년 양측은 서로를 파문을 선언하며 기독교는 현제의 동방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로 나뉘게된다.

중세[편집]

교황 그레고리오 1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교황은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면서 지속적으로 교회 영역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레오 1세에 이어 두 번째로 대교황 칭호를 부여받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게르만족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켜 서유럽 각지에 성당을 세우고, 전 중세기 동안 사제 양성의 기초가 된 《사목규정》(Liber regulae pastoralis)을 저술하였으며, 전례를 개혁했고, 미사 전문을 오늘날의 형식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산발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성가를 집대성하여 그레고리오 성가

그레고리오 1세의 후임 교황들은 이탈리아에서 동로마 황제를 대리하는 라벤나 총독랑고바드르족교황 스테파노 2세콘스탄티누스 5세 황제 대신 프랑크족피핀 3세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는 마르케, 움브리아, 라치오교황령교황 레오 3세카롤루스오토 1세교황 요한 12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7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왕족 및 귀족들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영지 안에 성당을 세우고 교황의 승인 없이 성직자를 자기 마음대로 임명하거나 사임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다. 세속 통치자들의 비호와 간섭을 받으면서 교회의 권위는 갈수록 약해지고 성직자들의 기강은 문란해졌다.[27][28] 이러한 악습은 세속 통치자들에 의해 고위 성직자들이 자주 공직에 등용되면서 널리 확산되었다.[29] 900년부터 1050년에 걸친 이러한 잘못된 관행과 부패를 바로잡기 위해서 클뤼니 수도원[28] 이러한 교회 개혁 운동은 1073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그레고리오 개혁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는데, 여기에는 성직매매교황 갈리스토 2세하인리히 5세 황제가 보름스 협약[27]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3세교회법

7세기부터 칼리프가 이끄는 이슬람교[30] 1095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교황 우르바노 2세[31] 우르바노 2세는 이에 응답하여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동로마 제국을 지원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과거 기독교 세력권이었던 지역들을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십자군

교황의 권위가 가장 크게 실추된 시기는 867년부터 1049년까지였다. 이 시기에 교황은 경쟁 상대였던 세속 권력에 굴복하여 사사건건 제한과 통제를 받아야 했으며, 적지 않은 수의 교황들이 감금되거나 아사하거나 암살당하거나 폐위당했다. 또한, 특정 가문이 무려 50년 동안 교황직을 독점하기도 하였으며, 그 가운데 한 명이었던 교황 요한 12세교황 레오 8세

1049년 교황 레오 9세

교회의 연이은 분열 (1054–1517)[편집]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는 1054년에 결정적으로 서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 분열은 교리적 이견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교황들은 라벤나 총독부성상 파괴 운동 이래 표면화되었으며, 9세기에는 필리오케 문제와 그에 따른 포티우스[32] 동서 교회의 분열공의회

동방 교회는 동로마 제국이 점차 세력이 약해지면서 함께 약해지기 시작했으며, 로마와 대등한 위치를 요구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장은 무시되었다. 동로마 황제는 두 차례에 걸쳐 동방 교회를 서방 교회에 강제로 일치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5세기에 오스만 제국

중세

동로마 제국에게 군사 원조를 하고 성지를 탈환한다는 명목으로 200년 가까이 벌인 십자군 원정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의 권위는 크게 하락했다. 유럽 각국의 군주들은 영토 분쟁을 벌여 힘을 키우면서 차근차근 중앙집권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4세교황 보니파시오 8세

그러나 1300년 교황은 필리프 4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나섰고, 이에 대응하여 필리프 4세의 고문이던 법학자 기욤 드 노가레는 1303년 교황이 로마 남동쪽에 있는 아나니의 별궁에서 휴가를 보낸다는 정보를 접하고 교황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과 결탁해 교황을 습격해 체포했다. 이 사건은 시민들의 반감을 사 보니파시오 8세는 이틀 만에 풀려났으나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한 달 후 선종하였다.

이후 교황권은 급격히 쇠퇴했다. 이후 선출된 교황들은 필리프 4세의 강력한 견제를 받다가, 결국 1309년 필리프 4세의 압박에 굴복하여 로마를 떠나 프랑스 남부에 있는 도시 아비뇽에 거주하였다.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약 70년간 교황들은 아비뇽아비뇽 유수교황 그레고리오 11세교황 우르바노 6세가 새 교황에 선출되자 프랑스인 추기경들은 이에 대해 무효 선언을 하고 프랑스 출신인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서방 교회의 분열[33] 교황은 로마에 머물렀으며, 대립 교황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아비뇽에 머물렀다. 그 결과, 교회의 분열은 명백히 국가적인 양상을 띠게 되었는데 잉글랜드와 헝가리,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의 대다수 도시국가, 신성 로마 제국 등은 로마 교황을 지지했으며, 프랑스와 나폴리, 사보이, 스코틀랜드, 스페인, 시칠리아 등은 아비뇽의 대립 교황을 지지하였다. 나중에는 대립 교황이 한 명 더 생겨, 세 명의 교황이 서로 자신이 진짜 교황이라고 주장하며 상대편을 서로 파문하였으며, 교회는 혼란에 빠졌다. 서방 교회의 분열은 1417년 소집된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마르티노 5세

소위 종교 개혁 ~ 현대 (1517 ~ )[편집]

가톨릭 개혁의 일환으로 교황 바오로 3세트리엔트 공의회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이며 성서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대사종교 개혁울리히 츠빙글리가 등장했으며, 제네바에서는 장 칼뱅다섯 솔라[34][35][36][37]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도 교회 쇄신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소위 종교 개혁 이후 출현한 개신교에 대응하기 위해 가톨릭 개혁교황 바오로 3세트리엔트 공의회[38] 이후 비오 5세, 그레고리오 13세, 식스토 5세

그러나 17세기 이후 서유럽 열강들의 압박으로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으며, 19세기에는 교황령이 두 차례에 걸쳐 소멸을 겪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한 번 소멸당한 교황령은 빈 회의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의해 영토가 줄어들다가 결국 1870년에 이탈리아 왕국

근대 이후 교황들은 점차 세속 권력을 잃어가면서 본연의 종교적 문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870년 교황 비오 9세가 소집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의 최종적인 결정권이 공의회에 있다는 주장(공의회 우위설)을 단죄하고 교황 무류성[39]

1901년 교황 레오 13세교황 비오 10세는 광대한 교회법을 현대화하여 새 법전을 편찬하고, 성무일도서첫 영성체교황 비오 11세 때에 교황청은 이탈리아 정부와 화해하고 라테라노 조약을 맺어 바티칸 시국공산주의

1950년 교황 비오 12세성모 승천

현대 교회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길을 열어놓은 역사적 교황으로는 교황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황 바오로 6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소비에트 연방성인시성[40]

교황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교리[편집]

교황직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마태 16,18-19: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요한 21,15-17: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루카 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

가톨릭 변증론자들이 교황 제도를 옹호할 때 가장 많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마태오 복음서

성경에서 새 이름을 받는 것은 새로운 지위나 사명을 뜻한다.[41] 그래서 시몬은 베드로가 된 것이다.[42]

‘베드로’라는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아람어 ‘케파’를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케파’는 ‘반석’을 뜻한다.

성경에는 반석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지를 말한다. 문자적인 뜻으로 쓰이기도 했지만[43], 대개는 힘, 확고부동, 안전하고 견고한 장소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44] 그래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신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많이 사용되었다.[45] 신약 시대에는 구약 시대에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느님이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한 사건을 예로 들며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는 예수를 반석에 비유하였다.[46] 이런 근거에서 예수는 시몬에게 “너는 베드로(반석)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예수 자신이 바위였기 때문에 바위로서의 모퉁이 돌의 특성을 시몬에게 부여할 수 있었다.

‘하늘나라의 열쇠’라는 구절은 바티칸 시국의 국장

성경에서 열쇠는 열고 닫는 권한, 즉 모든 권한을 상징한다.[47] 이렇게 교회의 전권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며 구체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라고 거듭 요청하였다.[48] 그리고 베드로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였다.[49]

이 밖에도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 예컨대 성 아우구스티노는 베드로를 ‘제1의 사도’라고 했으며, 에우세비오[50]

베드로에게 위임된 직책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이어져 오늘에 이른다. 이리하여 베드로란 이름은 고유명사인 동시에 보통명사가 되어 버렸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69년 6월 10일 제네바의 세계 교회 협의회[51]

다른 호칭들[편집]

교황직은 많은 직위를 지닌 자리다. 교황을 공식적으로 부를 때는 다음과 같다:

  • 로마의 주교 (Episcopus Romanus)
  • 그리스도의 대리자 (Vicarius Christi)
  • 사도들의 으뜸의 후계자 (Successor principis apostolorum)
  • 전체 교회의 최고 주교 (Caput universalis ecclesiae)
  • 보편 교회의 최고 사제장 (Summus Pontifex vel Pontifex Maximus)
  • 이탈리아 교회의 수석 주교 (Primatus Italiae)
  • 로마 관구의 관구장 대주교 (Archiepiscopus et metropolitanus provinciae ecclesiasticae Romanae)
  •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 (Princeps sui iuris civitatis Vaticanae)
  • 하느님의 종들의 종 (Servus Servorum Dei)

로마 교구를 통치한 주교들은 처음에는 성 베드로의 대리자로 명명됐지만 인노첸시오 3세에 의해 중세시노드에서 젤라시오 1세동서방 교회 대분열 이후, 그레고리오 7세

‘파파(Papa)’는 교황을 비공식적으로 부를 때 쓰는 명칭으로 아버지라는 뜻의 라틴어 ‘papas’에서 유래하였다. 일반적으로 교황에게는 ‘성하(聖下, Seine Heiligkeit 또는 Sanctitas)’와 ‘성스러운 아버지(Heiliger Vater 또는 Sanctissimus 또는 Beatissimus Pater)’라는 경칭으로 부른다.

또한, 라틴어로 최고 사제장이라는 뜻의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고도 하는데, 이는 ‘다리’를 뜻하는 폰스(Pons)와 ‘만들다’는 뜻의 파키오(facio)와 ‘가장 으뜸인 자’라는 뜻의 막시무스(Maximus)를 합성한 말로 말하자면 교황은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최고의 연결자 또는 대리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교황의 서명은 통상 ‘교황의 이름, PP, ○세’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바오로 6세의 경우 ‘Paulus PP. VI’라고 서명한다. PP는 파파(Papa)의 약어이며, 여기에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약칭인 ‘P.M.’ 혹은 ‘Pont.Max.’를 추가 기입하기도 한다. 회칙 등의 공식 문서에는 정식으로 ‘교황의 이름, 가톨릭교회의 주교(Episcopus Ecclesia Catholicae)’로 서명한다.

문두에는 ‘교황의 이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인 주교(Episcopus Servus Servorum Dei)’라는 서명을 자주 쓴다. 이는 그레고리오 1세

또한, ‘서방 총대주교(Patriarcha Occidentis)’라는 명칭도 소유하고 있었으나 2008년부터 교황청 연감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동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황청의 의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선출과 장례[편집]

교황의 선출[편집]

새 교황은 전임 교황의 선종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후 15일~20일 이내에 선출된다. 교황의 선출은 세속 선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될 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진다.

라틴어로 ‘열쇠로 잠근다.’는 뜻의 콘클라베라 불리는 교황 선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경당에서 이루어지며 국적이나 출신 등에 관계없이 80살 이하 전 세계의 모든 추기경

경당 밖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연기의 색깔로 새 교황의 선출 여부를 알게 된다. 검은 연기는 새 교황이 아직 뽑히지 않았다는 신호이고, 하얀 연기는 새 교황이 뽑혔다는 신호다.

새 교황을 언제까지 뽑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바티칸 역사상 가장 오래 걸렸던 교황 선거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후임을 뽑는 콘클라베로 1268년에 열려 2년 9개월에서 이틀이 더 걸린 1271년

새 교황이 확정되면 그는 “수용한다(Accepto).”는 답변으로 공식 확인하고, 수석 추기경이 회랑 가운데로 나와 군중에게 “하베무스 파팜(라틴어: Habemus Papam))”이라고 말하며 새 교황의 이름을 발표한다. 그러면 새 교황이 제단사들이 미리 준비한 임시 제의를 입고 군중 앞에 나타나 ‘로마 시와 전 세계에게’를 의미하는 라틴어 ‘우르비 에트 오르비[52]

만일 새로 선출된 교황이 주교품을 받지 않은 사람일 경우, 추기경단의 수석 추기경은 선출된 교황 당선자에게 주교품을 서품하며 당선자는 주교품을 받은 때부터 로마 주교가 되는 동시에 교황이 된다.[53] 교황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국적을 가져도 상관없다. 역대 교황 가운데 210명은 이탈리아 출신이었고 이 중 99명은 로마프랑스 출신 16명, 그리스 출신 12명, 독일 출신 8명, 시리아 출신 6명, 팔레스타인스페인, 아프리카잉글랜드,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 아르헨티나

이름[편집]

교황 선거에서 차기 교황으로 선출된 당선자는 교황직 수락 의사를 밝히면서 즉시 자신의 본명을 버리고 평소 존경하던 성인이나 전임 교황의 이름을 골라서 자신의 교황명(敎皇名)으로 삼아 공표해야 한다. 새 교황의 이름은 수석 부제 추기경이 곧바로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선출 사실과 함께 공포한다.

역대 교황명 가운데 가장 많이 선택된 것은 ‘요한’으로 지금까지 통틀어 23명의 교황이 이 이름을 선택하였다. 그만큼 가장 인기가 있으나 ‘요한’이라는 이름의 교황들이 가장 많이 시해당하거나 유폐되는 등 교회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건들이 이 이름과 관련이 깊어서 교황 요한 23세

‘요한’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이름은 ‘그레고리오’와 ‘베네딕토’로 둘 다 총 16명이 있으며, ‘클레멘스’는 14명, ‘레오’ 및 ‘인노첸시오’는 13명, ‘비오’는 12명 등이다. 다만 ‘베드로’는 초대 교황인 베드로만을 위해 쓰도록 정해져 있어 베드로를 교황명으로 쓴 사례는 없다. 이는 베드로를 향한 예수의 명명(마태 16,18)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라고 한다.

교황들 가운데 처음으로 개명한 이는 교황 요한 2세로, 본래의 이름인 메르쿠리우스교황 하드리아노 6세[54] 그리고 두개의 교황이름을 합쳐서 개명한 사람은 요한 바오로 1세가 처음이며 다음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되면 달라지는 것[편집]

  • 자신의 이름, 이전의 국적 및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
  •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규제를 받는다.
  • 일주일에 한 번씩 고해 사제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교황의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사제는 예수회
  • 교의상 로마 가톨릭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다. 교회 안 모든 법령은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교황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선례를 따를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전통을 폐지하고 교회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으며, 교서를 발표할 수 있고, 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교회 안 규정을 바꿀 수 있다. 어떤 문제들에 관해서는 추기경단의 자문과 충고를 받도록 되어 있지만, 모든 일에 있어 교황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 인간이 하는 재판은 받지 않기에 법정에 소환되지 않을 권한을 갖는다.[55]

교황의 장례 절차[편집]

교황의 장례식은 엄격한 형식과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교황의 시종관이 교황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56]하고 난 다음 교황을 상징하는 어부의 반지

그 다음에는 교황의 시신을 시스티나 경당으로 옮기는데 추기경들과 바티칸의 주요 인사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시신을 호위한다. 시신이 경당에 모셔지면 하얀색 실크와 특별하게 짠 팔리움으로 된 수의를 입힌다. 시신의 손에는 장갑이 끼워지고 교황의 주교관성 베드로 대성전

교황의 시신은 그곳에서 3일간 수십만 조문객들의 조문을 받는다. 이 전통은 과거 로마 제국의 장례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다. 장례 미사는 대성전 돔 아래에 있는 중앙 제대에서 거행된다. 장례 미사가 끝나면 시신은 윤이 나게 잘 닦인 삼중 나무관 속에 안치된다. 그 후 교황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문이 라틴어로 읽히며, 그 송덕문은 청동으로 된 원통에 담겨 교황의 발치에 놓인다.

이때 금화와 은화, 동화 등 동전들을 가득 담은 붉은 벨벳 자루를 시신 옆에 놓아두는데, 그 개수는 교황의 재임 연수에 따라 달라진다. 마지막으로 이전에 훼손시켰던 어부의 반지를 넣고 시신의 얼굴을 비단 천으로 덮으면 바로 관을 봉한다. 봉해진 교황의 관은 대성전 제대의 왼쪽에 있는 ‘죽음의 문’을 통해 아래로 천천히 운구 되어서 역대 교황이 묻히는 대성전 지하 묘소 안에 미리 준비한 대리석관 안으로 옮겨지고 나서 거대한 석판으로 덮여 안치된다.[57]

교황의 상징들[편집]

교황의 문장
  • 삼중관(Triregnum) : 교황이 머리에 쓰는 관으로 일반 주교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교황의 즉위 미사 때 사용되어 왔다. 삼중관은 교황의 통치권, 신품권, 교도권을 상징하며, 또한 유럽의 어떤 군주들보다도 교황이 더 위대하다는 뜻을 담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왕관 두 개를 겹친 듯한 이중관 모양이었으나 1362년 교황 우르바노 5세교황 요한 바오로 1세
  • 바쿨루스(Baculus) : 교황이 예식 때 쓰는 지팡이로 목장(牧杖)이라고도 한다. 이는 목자가 양을 칠 때 사용하던 지팡이에서 유래하며 목자의 직무와 권위를 상징한다. 일반 주교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원형으로 구부러져 있는 반면 교황의 지팡이는 윗부분이 십자가 모양이다. 교황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 팔리움(Pallium) : 양털로 만든 띠로 ‘잃었던 양의 비유’(루카 15,1~7)에서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교황의 명예와 자치권을 상징한다.
  • 어부의 반지(Pescatorio) : 교황이 손가락에 끼는 황금 반지인데, 이 반지는 예수의 수제자였던 성 베드로가 어부였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어부의 반지는 공문서를 봉인할 때 쓰고, 교황을 알현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은 채 어부의 반지에 입을 맞추는 인사를 한다. 어부의 반지는 교황이 선종하면 반지를 훼손시켜서 교황의 시신과 같이 넣는다. 이는 해당 교황의 통치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음 교황은 새로운 반지를 맞추어야 한다.
  • 하늘나라의 열쇠 : 성 베드로가 주저 없이 예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했을 때, 예수는 성 베드로에게 왕국의 문들을 열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사해 주었다(마태 16,13~19). 여기서 하늘나라의 열쇠는 지상의 권한을 상징하는 수위권을 상징한다. 그리고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이 그 권한을 계승하고 있다. 성 베드로가 열쇠를 잡고 있는 표현은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그러나 열쇠만을 분리해서 교황의 권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한 시점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는 교황을 상징하는 특별한 문장이 있다. 모든 교황들의 문장에는 삼중관을 포함되었지만, 베네딕토 16세의 문장에는 주교관

교황의 역할[편집]

교황의 교회 내에서 역할을 교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주님으로부터 사도들 중 첫째인 베드로에게 독특하게 수여되고 그의 후계자들에게 전달될 임무가 영속되는 로마 교회의 주교는 주교단의 으뜸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임무에 대하여 교회에서 최고의 완전하고 직접적이며 보편적인 직권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교회법 제331조; 교리서 881)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 교령을 승인, 재가 또는 정지시킬 수 있다.
  • 대사
  • 시복이나 시성
  • 주교를 임명하고 추기경
  • 교구를 설정, 관리, 변경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
  • 교구장을 보좌할 수 있도록 보좌 주교를 선임할 수 있다.
  • 교황청립 학교를 설립하고 인준할 수 있다.
  • 전례서를 출간할 수 있다.
  • 교회
  • 교황청
  • 공의회
  • 거룩한 날과 가톨릭 축일 등을 정할 수 있다.
  • 새로운 전례를 도입하고 낡은 전례를 폐지할 수 있다.
  • 믿을 교리를 공표할 수 있다.
  • 교회법
  • 가톨릭 정통 교의를 이교와 이단
  • 환속을 원하는 수도자들의 서원과 맹세를 풀어줄 수 있다.
  • 혼인관계의 특별관면을 해줄 수 있다.
  • 법원의 역할을 한다.
  • 사법절차의 규칙을 세울 수 있다.
  • 문책이나 처벌조항을 만들 수 있다.
  • 청문회를 열 수 있다.
  • 로마 교구를 위해 판사들을 구성하거나 종교회의 판사들을 지명할 수 있다.[58]

교황권에 대한 다른 기독교 교파의 입장[편집]

로마 가톨릭교회를 제외한 다른 기독교

동방 정교회

개신교

이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이 지상 교회의 우두머리이기 때문에, 교황의 통솔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 정교회는 불완전한 기독교이며, 교황 자체를 부인하는 개신교는 일치된 교회 공동체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에 정식 기독교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기독교 종파끼리 교황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교황제도는 현재 교회 일치 운동

세속 정치에서도 교황권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경우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관영 종교단체인 중국천주교애국회는 교황청이 아닌 중국 공산당을 따르고 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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