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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성 이냐시오와 예수회 ( 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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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이냐시오와 예수회

 

만일 로욜라의 이냐시오(1491~1556)에게서 위대한 전략가, 반종교개혁의 창시자, 인심과 새태에 정통한 사람, 심리학자의 모습만을 보려 한다면, 그것은 번번이 그를 아주 잘못 판단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는 첫째  심오한 신비사상가요 기도인이요 성인이었다.

 

그는 1491년 바스커 지방의 로욜라 성城에서 태어나서 궁정식 교육을 받았고, 나바라의 스페인 국왕 군대의 장교로, 다시 말해서 황제 카알 5세를 위해 봉사하였다. 프랑스 군에 대한 팜프로나 벙어전에서 그는 1521년 다리에 중상을 입었다. 오랜 병상생활에서 그는 개심하게 되었다. 이어 가진 몬세라트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순례로 그는 완전히 회개하였다. 만레사에서의 은둔생활(1522년 3월~1523년 3월) 그는 그의 신비사상으로의 변천을 체험하였고, 또한 그기서 그의 피정 소책자인 유명한 '영성수련'이 나왔으며, 장차 오로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찾겠다는 결심이 그때부터 그의 표어가 되었다. 이어 성지순례(1523년 6월~1524년 1월) 사제가 되려는 그의 결심이 무르익었다.

 

모든 난관을 무릎쓰고 그는 바르체로나에서 라틴어학교(1521~1526)를 마쳤고, 알칼라와 살라만카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1526~1527), 그를 의심하던 스페인의 종교재판으로부터으로부터의 여러번의 박해를 극복하였으며,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1528~1535). 파리에서 그는 몽떼귀 학원에 거처하였는데, 이미 여기서 에라스무스와 칼빈이 교육을 받았었다.

 

그는 파리에서 그의 주위에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들은 베드로 파베르,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시몬 로드리게스, 니콜라오 보바딜라였다. 그들과 더불어 그는 1534년 8월 15일 롱마르트에서 청빈과 정결 서원을 하였고, 또한 성지에서 포교활동을 할 것, 그러나 그것이 1년 내에 불가능할 경우 무조건 교황의 지시대로 무엇이든 교회의 임무를 위임받겠다는 서원도 하였다. 그는 파리에서 철학과 신학 학사학위를 획득하였다. 빨레스티나의 여행이 전혀 성과가 없었으므로 그는 1538년 그의 동료들과 함께 로마로 갔다. 그는 그 사이, 즉 1537년 6월 24일에 사제품을 받았었다. 그는 수도회를 세울 결심을 하였다. 바오로 3세는 그가 작성한 회칙을 1540년 9월 27일에 인가하였다. 그의 동료들에 의해 최초의 장상으로 선출된 이냐시오는 그때부터 로마에 체제하면서 그의 임무에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한편 그의 수도회도 신속한 발전을 보였다.

 

이냐시오가 결코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투쟁을 목적으로 그의 수도회를 창설하지 않았다는 것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인정된 사실이다. 오히려 그는 교회 안에서 오로지 그리스도에게 봉사하기 위해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내적 쇄신과 심화를 위해 활동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고와 의도가 프로테스탄티즘과 대립되어 있었던 것은, 그의 근본 입장이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입장과 완전히 대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신비사상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비사상에는 주관적인 광신이 전혀 없었다. '봉사의 신비사상'으로 불리게 된  그의 신비사상은 주 그리스도에 대한 꾸밈없고 사심없는 헌신이다. 그는 교회에서, 다시 말해서 로마교회에서 불멸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그는 탁신의 신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인간적인 것, 가련한 것, 약한 것은 신인(神人)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그것을 구속하기 위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영신적 교회는 비현실적이고 따라서 또한 비그리스도적이다.

 

이냐시오는 인간적인 것을 긍정하였고, 다만 죄악과 투쟁하려 하였다. 제도적인 교회는 그에게 있어서 계속 살아계신 그리스도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교회를 위해 솔직히, 실질적으로, 용감히 또 조건없이 붕사하기를 일순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시야는 그리스도의 것인 '세상'을 향해 개방되어 있었다. 여기서 바로 구원의 신비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는 바로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러한 '신비사상'에서 생활하였다.

 

이냐시오 역시 제도적인 교회와 충돌했었다. 벌써 학생시절에 그는 종교재판과 관련되어 투옥된 적이 있었다. 그는 광신적인 카라파 추기경과 크게 충돌했었고,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바오로 4세 1555~1559), 이냐시오에게 어려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 대한 신앙으로 흔들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구별할 줄 알았고, 그것을 인정하고 참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는 종교개혁가들과 구별되었고, 아니 바로 이때문에 그들과 대립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그의 사고와 의도는 '가톨릭적'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종교개혁가들의 주관주의와 심령주의, 자기 양심을 증거로 끌어대는 것에 대해, 이냐시오는 최고 권위인 교회와의 결합을 내세웠다. 자기 자신의 생활과 그의 수도생활의 심장인 교회에 대한 그의 순종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자신을 즐겨 이렇게 호칭ㅡ 그 이전엔 베드로의 대리자라 호칭)의 직무인 교황좌에 대한 그의 무조건의 충성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봉사를 의미하였다.

 

그는 그의 對 교회적 자세의 원칙을 그의 묵상서에 기록하였고, 또한 그것을 통해 기백만 인간들에게 널리 전하였다. 거기서 주어진 지시, 또는 '교회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위한 규정'은 트리엔트 후기의 정신을 결정지었다. 종교개혁가들이 그들의 영신주의에 맞지 않기 때문에 몰이해와 또는 맹목적인 열성에서 거부하였던 모든 것, 즉 고해, 성사, 미사성제, 수도서원, 성인공경, 순례, 대사, 전례, 금욕과 단식, 성화상 등등을 그는 깊은 탁신(託身)적 견지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더욱 큰 연관성에서 제시하였다.

 

그는 항상 다만 신앙만을 말해서는 안되며 선업에도 의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민중이 냉담하고 태만하여 질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은총만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고만 늘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거기에 자유를 말살하는 독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예정에 대해서만 언급해도 안된다. 하느님의 은총적 선택이 있고, 그것이 없으면 아무도 구원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은총과 협력해야 하는 것도 강조되어야 한다. 뿐더러 이 문제와 기타 모든 문제에 있어서 위계적인 교회가 가르치는 것은 유효하다. 아무도 성서를 자기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따라해석할 권리가 없다. 그것을 유권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최고 교도권의 권리이다.

 

이냐시오는 신과 인간, 은총과 자연의 협동이란 전통적 가톨릭 교리를 강조하여 마지 않았다. 종교개혁가들의 일방적 강조에 대해 그는 가톨릭의 종합을 내세웠다. "모든 것이 오직 하느님에게 매인 것처럼, 그렇게 기도하여라. 그러나 네 구원이 완전히 네게 매인 것처럼, 그렇게 협력하여라" 그는 종교개혁 이전의 상태를 복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건전한 종교적, 교회적 정신에서 내적인 부흥과 쇄신을 꾀하려 하였다. 그는 오류와 악습에 대한 투쟁에 대해 실언(失言)한 적이 없다. 그는 종교개혁가들을 끌어 댄 적이 없고, 또는 그의 저서에서 이단자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과 교훈으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하려 했다.

 

그의 제자들은 아주 짧은 기간에 이 새 정신을 전파하고, 가톨릭 신도들에게 다시 그들의 신앙에 대한 기쁨을 느끼게 했다. 이 시기의 새로운 예술 운동인 바로크보다 이 즐거움을 더욱 감명깊에 반영하는 것은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예수회 양식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실제로 하나의 예술 양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교적, 교회적 생활감정의 표현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반종교개혁(반종교개혁의 예술)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고, 오로지 종교개혁 이후의 가톨릭 부흥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무진장 솟아나오는 모든 새로운 신앙생활을 색과 양식에서 표현한다. 바로크는 미구에 가톨릭 성전, 특히 예수회의 성당을 장식하게 되었고,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그곳에 모인 민중들에게 그 내외적 기쁜 감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곧 바로코적 호화로운 기쁜 행렬이 다시 지방에서 행야여짐으로써 옛 축일과 가톨릭 관습이 부흥되었다.

 

예수회원들은 이 모든 것에 크게 관계하였다. 이냐시오가 사망했을 때(1566), 예수회는 이미 1천명 가량의 회원을 헤아렸다. 겨우 10년이 지났을 때 벌써 4천명으로 늘어났고, 1600년경에는 8,520명, 17세기 말에는 2만명이나 되었다. 예수회의 엄격한 중앙집권적 지도체제는 교회쇄신의 봉사에 있어서 예수회원들을 헌신적이고 매우 유효한 도구가 되게 하였다. 예수회가 배출한 성인들의 큰 숫자는 그 내적, 종교적 힘을 입증한다. 인도와 일본의 위대한 선교사 성 프란치스꼬 사베리오(1506~1552)도 예수회 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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