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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새 세계포교시대 ( 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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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계포교시대

 

신생 그리스도교가 완전히 유대세계에서 해방되고, 희랍·로마세계에 뿌리 박기까지 유태계 그리스도교인들은 오래동안 외교인 그리스도교인들을 감독하고, 그들 자신의 사고와 생활양식으로 그들을 구속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후 그리스도교 고대가 끝나고 희랍·로마 문화권에서 게르만적, 중세적 문화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긴장과 난관이 생겼다. 그리스도교가 새 문화에 완전히 고유하게 동화되기까지는 수세기가 소요되었다.

 

특히 중세기의 전기와 중기는 강력한 포교활동기였고, 이로써 전 유럽이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압력적인 것이 일어났다. 고대에 있어서는 지중해가 인접한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민족들을 하나의 커다란 문화권으로 결속시켰는데, 7세기에 회교가 마치 빗장처럼 유럽과 아시아·아프리카 사이를 가로막았다. 나머지 얼마안되는 그리스도교회만이 소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회교 지방에서 지탱될 수 있었다. 비잔틴은 노고와 궁핍으로 그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주로 유럽에 국한되었고, 마침내 이 유럽이 1054년의 불행한 희랍 이교로 말미암아 결정적으로 동방 그리스도교와 서방 그리스도교로 분열됨으로써 로마·가톨릭 교회는 일층 서구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회교의 장애물을 무력으로 분쇄하려는 십자군의 기도는 결국에 가서 실패하였다. 비잔틴과 동방 그리스도교를 서방교회로 강제로 돌아오게 하려는, 본시 불길하였던 기도 역시 불행하게 끝났다(1204년) 동방의 라틴제국(1204~1261)은 유감스럽게도 잘못된 현상이었다. 오스만 투르크(터어키)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플의 점령(1453)은 그리스도교적 서구의 판도를 더욱 축소시켰다.

 

마침내 16세기의 종교개혁은 서구교회가 빈곤해지고 축소되어가는 과정에서 만난 최후의 타격이었다. 대부분의 북부 지방을 상실한 후 가톨릭교회는 거의 완전히 동남부 유럽에 극한되엇음을 깨달았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오래동안 그리스도교적 유럽에서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 그곳의 대학들은 잔해에 불과했다.

 

지리적 발견의 시대

 

바로 이 무렵, 위대한 지리상의 발전시기에 있어서 세계포교의 새로운 과제가 교회에 주어진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15세기 중엽 이래 스페인 사람과 포르투갈 사람들은 남쪽으로 항해하였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1486년 희망봉에 도달하였다. 바스코 다 가마는 1498년 아프리카를 돌아 항해를 계속하여 인도에까지 갔다. 1500년 포르투갈인 카브랄은 브라질을 발견했다. 도처에 포르투갈 식민지가 생겼으니 (동)인도 해안, 아프리카, 브라질이었다(1505~1515). 마젤란은 포르투갈 국기를 달고 1519~1522)에 걸쳐 최초의 세계일주 항해를 성취하였다. 1516년 포르투갈의 상인들은 중국에 가는 데에도 성공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맨 먼저 광동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중국 정부의 정식 허가를 얻어 1567년 마카오에 거점을 설치하였다. 포르투갈의 항해자들은 1542~1543년 일본으로도 갔다.

 

그간 스페인인들도 이에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제노바 사람 콜룸부스는 1492년 이래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는데, 우선 중미 군도의 섬들을 발견한 그는 그의 세계 주항 중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믿고 그것을 서인도로 명명하였다. 페르난도 코르테스는 1519~1521년 멕시코를 정복하였다. 이어 1520년에는 칠레가, 1525년에는 아르젠틴이, 1532년에는 페루가 발견되고 정복되었다. 카알 5세의 제국에서 해가 지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모든 발견에 있어서 종교문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사업욕과 모험심,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관심과 함께 포교열도 이러한 기도를 충동한 주요동기가 되었다. 가장 난폭한 '정복자들'까지도 정복된 민족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것을 본래의 의무로 느꼈다.그 방법들은 물론 종종 위험스럽고 창피스럽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복과 동시에 이교를 그 지방에서 근절시키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제로 이식하는 것을 그들의 명예로 여겼다. 그들은 늘 선교사들을 대동하였다.

 

정복자들과 선교사들과의 이러한 긴밀한 협력은 매우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포교지 자체에 축복을 주지 못하였고, 해외국가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가 현지의 민족과 문화와 유기적인 융합에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표고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가 확고하였고, 또한 현지의 원시종교가 큰 내적인 저항을 보이지 않은 중미와 남미같은 지방에서만 실시 될 수 있었다. 인도, 중국, 일본 등 오랜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느 그리스도교가 그 기반을 거의 확고히 할 수 없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사람들은 아직도 완전히 중세의 정치적, 종교적 통일 사상에서 행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식민정책과 강제적인 개종정책은 원주민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착취자와 압제자의 종교로 보이게 하였고, 이것은 왕왕 현재까지도 그리스도교 포교활동과 더불어 지속되는 비난이다. 이러한 고발이 당시 얼마나 정당한 것이었는가는,고귀한 도미니꼬회원 라스카사스(1474~1566)가 수십년간 인디안의 인간다운 취급과 평화적인 포교방법의 도입을 위해 투쟁한 사실에서 증명된다. 그는 폭력사용의 부당함을 느끼고 거부한 유일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흑인과 노예들의 아버지인 성 베드로 클라베(1654)의 생애와 활동은 폭력에 대한 가장 큰 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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