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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예수회의 해산과 재건 ( 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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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의 해산과 재건

 

예수회의 역사를 크게 아래의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이냐시오 (1491 1556)

2. 2대총장 아쿠아비바 총장 (1558 1615)

3. 구예수회 (1615 1757)

4. 해산과 재건 (1758 1853)

5. 신예수회 (1853 1964)

1) 예수회의 탄생배경, 이냐시오 성인의 삶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로부터 시작된 수도생활의 전통은 크게 두 방향으로 발전합니다. 첫째는 수도서원을 하고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동시에 사목활동을 하는 형태의 수도전통인데 아우구스티노회와 도미니코회 등이 이에 속합니다. 둘째는 신앙 및 수덕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전통인데 베네딕도회와 프란치스코회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는 새로운 수도회를 창설하면서 두 개의 몫을 함께 수렴하고자 했습니다.


이냐시오성인이 활동할 당시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면서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이슬람의 세력을 몰아내고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결혼하면서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당시 페르난도왕의 재무대신이었던 벨라스케스는 어린 이냐시오를 시동으로 맞이하여 기르면서 궁정문화를 익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냐시오는 26세가 되던 해까지 궁정에서 교육을 받으며 그 곳의 문화를 익혀갑니다. 훗날 이냐시오는 당시의 자신을 헛된 명성을 쫓은 사람이었다고 회상합니다. 하지만 벨라스케즈는 프란치스코회의 재속회원이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여러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고 합니다.


1517년 이냐시오는 Navara의 기사로 파견되는데 팜플로나의 전투에서 다리를 다친 후 형수의 집에서 요양기간을 보내게 됩니다. 당시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 황금전설과 같은 신앙서적을 읽고서 새로운 방향으로의 삶을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회심은 아주 극적인 것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이전부터 그가 가진 신심 및 신앙생활과도 관련이 있기에, 어느 정도 준비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예루살렘으로 가 그 곳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고자 하였으나 가지 못했으며, 훗날 사람들에게 영신수련을 지도하거나 설교를 하면서 3차례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이냐시오는 St.Barbere와 파리대학교에서 수학을 하게되는데, 훗날 함께 일할 동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동료들은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었는데, 예를 들어 2대 총장을 역임한 라이네즈는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 converso출신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수도회에서 converso를 받아주지 않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는 파격적인 인사였습니다.


1540년 예수회는 교황으로부터 공식인가를 받게 되었으며, 1541년 이냐시오는 총장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1550년 예수회는 재인가를 받으면서 160명 제한 규정이 폐지되면서 회원수가 급격히 늘어나게 됩니다. 이냐시오가 살아있는 동안 예수회의 설립, 회헌의 완성, 영신수련이란 세 가지 큰 일이 이루어진 셈이지요. 훗날 이냐시오가 시성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관대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그의 영성은 다른 것을 함께 포용하는 가장 가톨릭적인 특색을 띄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영성을 활동 중의 관상, 세속적인 신비주의등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분의 삶을 다시금 회고하자면 그 분의 의도한대로 흘러간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바랬던 예루살렘 성지 방문의 뜻이 좌절되었기에 훗날 예수회가 탄생할 수 있었지요. 훗날 예수회 대학의 설립 및 하비에르 성인의 인도파견 등의 미션도 그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밖에 살메론과 라이네즈의 트리엔트 공의회 참석, 파브르의 독일 선교, 시칠리아의 예수회 대학의 설립 등도 이냐시오가 계획하지 못했던 것을 하느님께서 성공적으로 이루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2대 총장 라이네즈, 3대총장 아쿠아비바

2대총장 라이네즈의 재임 당시 교황이었던 바오로 4세는, 추기경 재임시절 이냐시오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성무일도 합송의 부활을 요구하는 등 예수회에 대한 간섭을 늘리고자 하였으나, 얼마있지 않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러한 요구사항을 이행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37세에 총장으로 임명된 5대총장 아쿠아비바는 가장 위대한 예수회 총장으로 일컬어집니다. 당시 예수회는 크게 외적인 성장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성인들을 배출하게 됩니다. 수아레즈, 알퐁소 로드리게스, 알로이시오 곤자가 등이 당시의 성인이었습니다.

 

3) 구 예수회

16세기 후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후발주자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이 각축을 벌이는 시기에 돌입합니다. 17세기에는 합리론, 경험론 등이 근대철학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18세기에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이 근대철학의 태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예수회는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에 예수회가 연루된 세가지 큰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서약논쟁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의 런던의회 폭파 음모에 예수회가 연루되어있다는 음모로 상당수의 예수회원이 죽임을 당하였고, 당시 영국의 정부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가톨릭 신자 및 성직자들에게 에 대한 충성서약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부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토마스모어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두 번째는 얀세니즘과의 대립입니다. 얀세니즘을 대표하는 인물로 파스칼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프랑스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지역주교에게 친하며, 반수도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140여 년간 예수회와 대립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은총과 인간본성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중국에서의 전례문제와 축소지(reduction) 문제입니다. 중국에서의 선교활동 중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전략이 어떤 이들에게는 반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예를들어 파스칼은 예수회원들은 그리스도교를 전하면서 중국인들에게 십자가를 가렸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남미에서의 축소지(reduction)를 예수회원들이 반란군을 양성하는 곳처럼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4) 해산과 재건

이후 프랑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서 예수회는 차례로 해산이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예수회가 당시의 민족주의에 반하는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프러시아와 백러시아에서 예수회는 명맥을 이어가는데, 이는 프리드리히 1세와 예카테리나 1세가 예수회의 교육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1814년 예수회가 다시 재건될 당시 예수회는 프러시아에서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5) 신예수회, 예수회 사도직의 성격

이후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예수회는 교황의 권위를 옹호하며 교회 안에서 보수적인 경향을 띄게 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토미즘에 칸트철학을 적용한 칼라너나 로너간과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느님이 당신의 도구로 예수회를 선택하여 일을 한 것이지, 예수회원들의 힘만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회의 역사는 우리들이 결코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당신의 이름을 프란치스코로 선택한 것 역시도 겸손의 의미를 강조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회의 사도직에 있어서 교육사도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원래 이냐시오 성인은 교육사도직을 계획하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과 교회의 요구에 응한 것이었지요. 예수회가 요구에 부응할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의 영성에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에 좋은 수단이라면 기꺼이 취함이 옳은 일인데, 교육사도직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에 예수회가 들어오게 된 것도 교육시설의 필요성에 응답하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교육사도직 역시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사도직 종사자들이 세상의 논리에 따라가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탁발수도회는 청빈한 삶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교 등을 중시합니다. 한편 예수회는 비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대상으로도 설교 및 가르침을 펼쳐왔으며 그들과 함께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왔기에 세속학문을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교적 개방적 다원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세상의 문화 속에 깊숙이 들어가다 보니 오히려 우리가 세상의 문화에 물들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회원들은 더욱 깨어있으면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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