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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가톨릭 일반상식과 간단한 교리를 담는 게시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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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교회사 - 제1차 대전부터 현재까지 ( 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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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전부터 현재까지

 

약 1천명만명의 사망자와 2천만명의 부상자는 국제전의 슬픈 결과였다. 이에 대한 충동은 한편으로는 전쟁의 체험 자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후의 새로운 정신적 상황의 조성이었다. 낡은 구속이 폐기되고, 새로운 시작이 주어져야 했다. 이 시기는 교회를 위해서도 놀라운 변혁의 시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지난 날의 과실을 해명하고, 새 길을 추구하였다. 동시에 그리스도교계의 공동 기반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고, 깊고 새로운 교회체험을 하게 되었다. '교회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귀양살이에서의 귀환

 

가톨릭교가 세계문명에 대해 더욱 큰 연대 책임을 져야하고, 지난날의 낙후성을 만회해야 한다는 인식이 독일에 침투하였다. '혹흐란트' 발행자 카알 무트 같은 사람들은 문화적, 학문적, 정치적 생활에서 가톨릭신도의 '열등'을 지적하여 마지 않았고, 가톨릭 대중에게 현대적 과제에 협조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들은 반근대주의적 정신병자 비오 10세 아래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심한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시정책을 단호히 요구하였다. 철학자 피터 부스트는 이에 관해 진행되던 토론을 '귀양살이에서의 귀환'이란 표어로 제시하였다.

 

과거를 되돌아볼 때, 가톨릭교가 19세기에 있어서 그의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내적으로 위축되어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국가주의적 교회, 종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적 오만성이 가톨릭교에 대해 계속 게릴라전을 일으켰었는데, 그것은 독일의 문화투쟁, 교황직 및 교황령에 대한  투쟁을 겸한 이탈리아의 재흥운동, 19세기 전환기에 있은 프랑스의 반교회 투쟁 등에서처럼 때때로 교회의 존립마저 위협할 수 있었다. 이때문에 가톨릭교는 계속 수세에 몰렸고, 가톨릭 신도들은 공생활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격리적 방법은 그들에게 학문, 문화, 정치에 있어서 공동으로 형성하는 데 대한 배척과 포기를 의미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근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에 참여하는 기회를 놓쳤다. 이에 관해 아래 두 가지 예를 들겠다.

 

19세기의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적 노력이 가톨릭교회에서 무시되었다. 교황들은 모든 민주주의적, 사고에 대해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 이래 '민주주의에 대해 충격과 불안한 콤플렉스'에 걸려 있었다. 재건시기에 있어서 그들은 '왕권과 제단의 유대'를 다시 긴밀하게 하였다. 드 라머네와 드 메스트로는 군주제를 유일하고, 하느님이 원한 정치체게로 천명하였다. 그것이 보수주의로 잘못 이해되어 가톨릭교의 한 기본 신조가 되었다. 교항들은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공화제에 대한 프랑스 가톨릭의 거부는 19세기 말에 프랑스에서 반교회투쟁을 낳게 하였다. 그것은 독일에서 1차대전 이후까지도 많은 가톨릭으로 하여금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올바른 민주주의적 이해를 갖지 못하게 하였다.

 

사회문제도 그 특성이 교회로부터 제때에 인식되지 못했었다. 19세기 전반기의 가톨릭 사회이론가들은 단순한 보수주의에서,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일어나는 자본주의적 사회제도 자체를 반대할 수 밖에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공업 노동자들의 비참을 오로지 자선활동으로 구제할 수 있가가 생각했다. 그들은 고대교회의 이자利子 금지를 되살리고, 자본주의를 근절하고, 중세의 계급질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다. 1848년에 아직도, 후에 '사회적 주교'로 불려진 케틀러의 주임신부 벨헤름은 마인쯔에서 열린 제1회 가톨릭 신도대회에서 "사회문제의 해결은 가톨릭교회에 유보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보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원하는 대로 사회문제의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라도 그것을 이행할 힘이 국가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였다.

 

물론 국가적 사회입법이(1882~1883과 그후) 나오기까지는 아직도 근 40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교회가 뚜렷한 사회정책적 개념을 갖게 되고, 거기에 이웃사랑만으로는 구제할 수 없는 구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는 오래고도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러는 동안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노동자 대중을 정복하였고, 노동자들이 점점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레오 13세의 시회회칙은 너무 시기가 늦었었다(1891). 교회가 그의 유산층을 고집하고 있는 동안, 무산계급은 무신론적 마르크스주의로 넘어갔다.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의 고유한 책임에 대한 자각과 함께 교회 내의 쇄신이 동시에 일어났는데, 그것은 전쟁 후기의 가톨릭의 영성을 결정적으로 규정하였고, 또한 그것을 교회와 관련지었다. "한 종교적 사건이 예측하지 못할 영향력을 갖고 발생하였다. 즉 교회가 영혼 속에서 소생한 것이다." 이렇게 로마노 과르디니는 1922년 예언적으로 선언하였는데 정말 그러하였다. 전우로서 체험된 공동체생활 및 공동체적인 청년운동의 이상은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재발견하게 하였다. 전례운동과 교파들간의 '제일치적' 이해가 병행하였다. 새로운 교회의식은 교회상의 변천의 기초가 되었다.

 

이 새로운 교회상은 교회를 교황 지도하의 신앙의 공동체요 구원의 공동체로서 이해한 벨라르미노의 순 반종교개혁적이고 법률적으로 강조된 정의, 그때까지 계속 유효하던 정의로부터의 이탈하였다. 그 대신 교회를 다시 계속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로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발견하였다. 집단적인 자세는 그리스도 신비체의 - 모두가 그 지체에 불과하다 - 공동체적 표현에서 감격하였다. 공동기도에 대한 의식은 하느님의 백성이 공동으로, 또한 연대책임에서 예배를 드리는 전례를 새로 발견하게 하였다.

 

교회의 새 의식: 전례운동

 

새로운 전례운동은구가 1909년 멕헬른에서 시작되었다. 벨기에의 가톨릭 신도대회에서 처음으로 신자대중에게 접근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따. 베네딕도회원 보뒤앵은 "전례를 민주화해야 한다"고 요구하였고, 이렇게 그는 발전의 길을 개척하였으며, 그것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지방으로 파급되었다. 마리아 라흐 대수도원과 노이부릌므 수도원이 그 선구자가 되었다. 독일의 가톨릭 청년운동은 전례운동을 그들의 고유한 것으로 만들었다. 청소년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수많은 저술과 강연을 통해 전례정신을 배양하고 심화시켰다. 많은 젊은 성직자들이 전례에 감동되었다. 국가사회주의적 교회박해 시기에 있어서 외적 활동이 저지되어 있었을 때, 교회전례의 공동체적 구성력이 새롭게 체험되었다. 미사의 전례적 공동집전은 제2차 대전의 어려운 때와 또한 전쟁후의 비참한 때에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의식처가 되었다.

 

교회당국도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이 운동에 교회를 개방하였다.그리고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헌장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큰 계통을 이룬다. 전례운동은 전례쇄신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전례정신에서 신자들의 쇄신을 이룩하려는 것이고 "성령을 그의 교회를 통해 침투시킴으로써"(비오12세) 그것을 체험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운동은 오늘의 교회를 위해 가장 강한 힘의 원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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