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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 2. 원망을 기도로 승화시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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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을 기도로 승화시켜야


불굴의 의지로 암투병을 해왔던 가수 길은정씨 사망소식이 며칠 전 안쓰러움을 자아내더니, 이번에는 전(前) 대법원장 유태흥옹 자살 소식이 우리를 안타깝게 하였다. 평소 신병으로 극심한 허리통증에 시달리며 삶을 비관해 왔다고 하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하고 동정이 간다. 유족들의 아픔은 또 얼마나 클까.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태어날 때(生) 울고, 나이 들도록(老) 온갖 인연으로 고통을 겪고, 병(病)들어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마지막 죽음(死)마저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어느 본당에서 사목하고 있을 때 몸이 많이 불편한 자매가 있었다. 혼자서 간신히 걸어 다닐 정도이고 발 한번 떼려면 한참씩 걸리기 때문에 성당에 다닐 때에는 꼭 누가 부축해 준다. 이 자매가 시단(詩壇)에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신앙시 좀 써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더니 자매의 대답이 가슴을 한방 쳤다. "신부님, 나는요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하느님 원망하고 하느님 욕해요. 어떻게 그걸 시로 써요." 나는 애써 있는 그대로의 감정 표현도 기도가 될 수 있고 시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해 봤다. 자매의 대답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고통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도 없다. 고통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본능적이고 육체적 고통에 한정되어 있는 동물과는 달리, 정신적 고통 때문에도 괴로워한다. 자녀 문제, 이별, 상실, 질병, 사고, 경제적 어려움, 좌절의 아픔, 외로움, 누군가에게서 배척이나 소외 등으로 잠을 뒤척이고 괴로워하고 신음한다.

 고통이 인류가 똑같이 겪는 숙명임에 비할 때, 한국인에게 특별히 두드러지는 시달림이 하나 있다. 불안(不安)이 바로 그것이다.

 여러 가지 변수들을 종합해 보면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뭐니 뭐니 해도 한국인을 가장 불안케 하는 것은 초스피드 변화다. 통계가 이를 입증한다.

 첫째로, 급격하게 농촌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 변화했다. 1960년대 도시 인구 대 농촌 인구 비율이 28:72에서 2000년도에 이르러 89:11로 뒤집혀 거의 전국토의 도시화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또 구미 선진국에서는 50년 내지 100년 걸려야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었던 노동집약산업→기술산업→자본집약산업→지식정보산업으로의 발전을 한국은 매 10년마다 이룩하였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미국의 드러커(P. Drucker) 교수는 한국사회가 1960년대 이후 이루어낸 변화 속도는 세계사에 남을 '경이'(wonder)라고 찬탄했던 것이다.

 둘째로, 한국인이 세계에서 가장 이사를 자주 다닌다는 것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인구 유동성은 20%대를 상회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는 유럽의 약 10배, 일본의 약 4배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변화와 유동성은 바로 한국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정도를 시사해 주고 있다. 이뿐이 아니다. 남북 대치 속에서 '북핵문제'가 연일 국제급 뉴스로 보도되는 가운데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 불안하다. 이미 아이 때부터 불안하다. 시험에 떨어질까 봐 불안하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야 하니 불안하다. 승진을 못하면 도태되기에 불안하다. 미래에 뭐가 밀어닥칠지 모르니 불안하다. 건강이 예전처럼 따라주지 못하니 불안하다.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사람대접을 못 받으니 불안하다. 또 오늘 아무 일 없이 지나간 것이 아무래도 괜히 불안하다. 특별한 일이 없어서 집에서 가만히 쉬고 있자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불안하다. 이래서 불안하고 저래서 불안하다. 이 불안은 일찍이 교회가 통찰했던 그 불안의 도를 넘는다. "따라서 희망과 불안이 엇갈리는 사이에서 현대인은 스스로 의문을 품으며 안정을 찾지 못한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4항).

 고통이나 불안에 처할 때마다 오늘의 우리는 묻는다. "왜?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야 하는가?" 하늘에다 대고 항변도 해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벌을 나에게 주십니까? 착하게 죄 없이 살려고 노력한 나에게 이게 뭡니까? 너무 혹독합니다." 삶을 원망하기도 한다. "오, 하늘이시여, 왜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합니까?"

 그 옛적 하느님 사람들은 이런 물음을, 항변을, 원망을 기도(祈禱)로 승화(昇華)시킬 줄 알았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 사람들은 부르짖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지고 뼈 마디마디 어그러지고, 가슴 속 염통도 촛물처럼 녹았습니다. 깨진 옹기조각처럼 목이 타오르고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시편 22,1-2.6-7.14-15).

 불안 속에서 하느님 사람들은 읊조렸다. "어찌하여 내가 이토록 낙심하는가? 어찌하여 이토록 불안해하는가?"(시편 42,5) "나를 구하소서. 하느님, 목에까지 물이 올라왔사옵니다.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시편 69,1-2).

 나아가 삶을 저주하며 탄원하였다. "저주받을 날, 내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어머니가 나를 낳던 날…. 모태에서 나오기 전에 나를 죽이셨던들, 어머니 몸이 나의 무덤이 되어 언제까지나 태속에 있었을 것을! "(예레 20,14-18)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숨통이라도 막혔으면 좋겠습니다"(욥 7,15).

 잘 알아들어야 한다. 이는 기도였다. 능력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을 향한 강력한 청원이었다. 구제와 위로와 도움을 청하는 믿음의 기도였다. 성서는 그들이 이윽고 야훼의 응답을 만났다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시련의 시기를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어찌해야 옳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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