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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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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 4. 하느님 코드,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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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찾게 하는 도구, 불안

최근에 나온 「한국 교회 미래 리포트」(2005, 갤럽) 한국 종교 현황 통계를 보면, 신앙생활 이유를 묻는 질문에 개신교 신자들 45.5%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라고 가장 많이 답했던 반면, 불교 신자 74%, 가톨릭 신자 73.2%가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가톨릭신자는 천국 지향의 교조적 영성보다 평화지향의 실존(實存)적 영성에 기울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오늘 주제는 실존적 영성의 실마리에 해당하는 '불안'이다. 불안은 지난주 다루었던 고통과 더불어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에 설치해 놓으신 또 하나의 하느님 코드이다.

 인간 자아는 태어나면서부터 불안을 안고 산다. 그런데 불안(不安)이라는 것은 공포(恐怖)와는 다른 것이다.

 '공포'는 동물도 느낄 수 있다. 눈앞에 주어진 자극이나 위협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생기는 원초적 감정을 공포라고 한다. 쥐는 눈앞에 갑자기 고양이가 나타나면 공포에 떨면서 안절부절못한다. 이것은 사고 작용이 없어도 생기는 일종의 반사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안'은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감정 상태다. 불안은 반드시 생각의 결과로 생긴다. 자신의 존재와 관련해서 어떤 위기나 피해를 미리 상상하거나 불길한 일을 예상할 때 그 생각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 불안이다. 동물은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 동물이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불면증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 '불안'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다. 그는 불안이야말로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며, 이 불안 때문에 인간은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은 단계에 따라서 심미적 삶, 윤리적 삶, 종교적 삶을 사는데 불안이 앞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우선 사람은 본능적으로 심미적(審美的) 삶을 산다고 한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은 감각적 쾌락을 좇아 살거나 환상에 빠져서 산다. 삶을 기분풀이로 여기며 쾌락을 탐닉하면서 기분에 따라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러한 삶은 결국 권태와 싫증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마침내 무기력한 자신의 눈에 비친 인생은 무상하며 미래는 불안하고 그들은 절망한다. 이 절망은 새로운 삶을 찾게 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의 늪을 넘어 윤리적 삶으로 도약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불안으로 인해서 이제 두번째 단계인 윤리적(倫理的) 삶이 시작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게 된다. 사람은 이제 내면의 양심에 호응하고 의무에 성실하려고 애쓴다. 이제 비로소 인간은 '되어야 할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단계도 결국 벽에 부딪치고 만다. 높은 도덕에 이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 그리고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무력함을 절감한다.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이 뜻대로 잘 안 되고, 또 윤리적으로 산다고 세상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엉터리로 사는 사람들이 망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서 고뇌하는 인간은 마침내 죄의식과 불안에 빠지고 절망하게 된다. 이 불안과 절망은 다시 도약을 요구한다. 이 불안과 절망이 사람을 신(神)에게로 내몬다고 한다. 이 현실의 모순을 심판해 줄 하느님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마침내 불안은 윤리적 삶에서 종교적(宗敎的) 삶으로 옮겨가도록 사람들을 이끌어준다.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고 말한다. 스스로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불안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찾게 한다. 불안하기에 하느님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 하느님이 쉽게 손에 잡히지 않고 은폐되어 있거나 없다고 느끼기에 자아는 더욱 불안하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 온전히 안기게 될 때에 비로소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기에 성 아우구스티노(354-430)는 다음의 유명한 말을 했던 것이다.

 "오 주님,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수 있을 때까지는 불안하나이다."(고백록 1권 1장)

 유다인은 독일인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하는 그 순간에 시편 23편 '야훼는 나의 목자'를 외우면서 두려움 없이 장엄하게 죽어갔다고 한다.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란 풀밭에 이 몸 뉘여 주시고…." 하느님 약속 말씀에 의지하는 것이 불안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다. 하느님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오늘의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다.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무서워 떨지 마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느님 야훼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여호 1,9; 이사 43,1; 예레 46,27-28).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5-37).

 암송하고 마음에 새겨두면 두고두고 격려가 될 것이다.

 성서는 또한 기도로서 역경을 이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를 위로한다. 성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바친 기도가 '부르짖음'의 기도였다고 전한다. 시편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시편 22,1).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벼랑 끝에 매달려 절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위대한 인물들 기도뿐 아니라 카인 같은 죄인의 부르짖음과 하갈 같은 천민의 울부짖음도 들어주셨다. 예수님도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나인의 과부와 눈을 뜨게 해달라는 예리고 소경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극심한 괴로움의 순간에도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와 희망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 숱한 하느님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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