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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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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 7. 99% 부족할 때 '하느님 진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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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열리는 99%의 세계
 
 
사람의 이성과 오관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는 전체 진리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나머지 99%의 진리는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99%의 세계는 비현실세계가 아니고 엄현한 현실세계이다. 우리 주변에서 '갑자기', '이유 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들이 사실은 이 99%에 해당하는 현상들이다. 믿음은 바로 이 99%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믿음은 우리를 무한한 가능성의 장(場)인 99%의 세계로 안내해 준다. 그 과정과 결과로서 세 가지 비약적 변화가 동반된다.

 첫째, 지성적 믿음이 생겨 안목(眼目)이 바뀐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믿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지성적 수용이라고 말했다. "신앙은 하느님의 진리에 동의하는 지성적 행위이다"(신학대전, 2-2, 2-9). 그러니까 우리가 교리나 성서 내용을 듣든지 읽든지 해서 접하게 될 때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지난날 안목을 버리고 새로운 안목을 택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전하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믿었습니다"(1고린 15,11)라는 말씀이 내 고백이 되었을 때, 내 안에서는 전혀 새로운 안목이 형성된다.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금시초문의 새로운 사실을 긍정하는 새로운 차원의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의 지적 안목은 '앎'에서 '믿음'에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오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보이는 세계에 대해 검증된 지식을 배워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안다'고 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들리지 않아도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신비의 세계에 대한 체험이나 정보, 곧 종교적 진리를 배워서 수용하게 될 때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믿음은 어떤 증거나 확증 없이 무턱대고 믿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기적, 예언, 교회 확산과 그 거룩함, 그 풍요함과 확고함 등이 "모든 이들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는, 계시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가톨릭교회교리서 156항)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신앙의 은총은 '마음의 눈'(에페 1,18)을 열어줌으로써 그동안 알지 못했던 진리들(하느님 계획 전체, 신앙의 신비, 그리스도 역할 등에 대한)을 이해하게 해 준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 성인 금언대로 우리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 것이다."

 둘째, 정서적 믿음이 생겨 하느님을 더욱 신뢰하게 된다.

 지성적 믿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의지하는 정서적 믿음으로 발전된다. 그러니까 "하느님이 계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지성적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하느님 현존, 사랑, 예수께서 주시는 용서와 평화 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 느끼고 체험하도록 하는 것을 정서적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믿음으로 인해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돈독한 정적 관계 곧 신뢰를 형성하게 된다.

 성서는 바로 이런 믿음을 가져서 하느님 구원과 은혜를 누린 수많은 증인들의 증언을 수록한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특히 아브라함은 이 믿음이 굳건하여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히브 11,17).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선하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의탁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을 해냈다. 이러한 믿음을 갖도록 성서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야훼만 믿고 살아라. 땅 위에서 네가 걱정 없이 먹고 살리라"(시편 37,3).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셋째, 의지적 믿음이 생겨 (약속) 말씀의 구현을 이뤄낸다.

 정서적 믿음은 의지적 믿음에로 발전한다. 하느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되면 이제 우리는 세상의 셈법을 따르지 않고 조건이 어떠하든지 하느님 뜻이 이루어진다고 확신한다. 철석같이 믿는 것이기에 "의지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에 대한 하느님 응답, 신앙 안에 키워 온 어떤 꿈, 거창하게 표현해서 '비전' 같은 것이 현실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 이것이 바로 이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히브 11,1).

 내게 위대한 소망이 있다면 이 소망을 확증해 주는 것이 의지적 믿음이다. 이 믿음은 미래 사실들을 현재 사실들로 당겨서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굳은 의지로써 하느님과 그분 약속을 붙들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신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미래를 현재처럼 느끼게 해주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누리도록 해준다. 그래서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방황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다.

 토마스는 1%의 세계에서 예수님 행적을 바라본 제자였다. 그의 인식구조는 철저히 3차원에 갇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눈'과 '손'으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다며 의심을 품었다(요한 20, 25).

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봄'과 '만짐'을 통하여 1%의 세계를 사는 이들의 인식조건을 충족시켜 주시되 거기에 머물지 않으셨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하심으로써 99%의 세계로 토마스를 초대했던 것이다. 이로써 토마스는 그동안 자신이 알지 못했던 세계의 문턱에 들어서게 된다. 문턱을 들어서며 토마스는 고백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

 이제 토마스는 눈이 열렸다. 그래서 자신 앞에 서 있는 인간 예수, 스승(랍비) 예수에게서 우주와 역사를 섭리하시는 주님(Kyrios)이요 하느님(Deus)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토마스는 지적으로 안목이 바뀌고, 정서적으로 하느님과 관계가 요지부동으로 든든하여지고, 의지적으로 (약속)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 실행하는 삶(야고 2,20 참조)을 살게 된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실패와 단절과 부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1%의 세계에서만 허우적거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감히 99%의 세계에 마음을 열면 길이 트일 수 있다는 사실에 눈감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보같이 고집부리지 말자. 1%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자.

자기 판단과 느낌에 매여 살지 말자. 믿음으로(신념으로, 비전으로) 사는 법을 새롭게 배워보자. 1%의 우물 안에 갇혀 살지 말고 99%의 드넓은 가능성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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