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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 8. 운명을 건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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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 2,9). 이 놀라운 은총을 누리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제 이 믿음의 고백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나는 믿는다! 욥이 궁지에 몰렸을 때 마지막 보루로 붙들고 늘어진 것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였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욥기 19,25).

 고통의 막다른 골목에서 욥은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이것이 욥의 신앙고백이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욥은 불시에 재산, 자녀, 가축들, 마침내는 자신의 몸뚱아리까지 '날벼락'을 맞아야 했다. 이를 보고 욥의 친구들이 욥을 위로해 준답시고 가뜩이나 억울한 속만 더 뒤집어놨다. "그것은 필경 죄 값임에 틀림이 없으니 하느님께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빌게나!"

 이렇게 친구들은 욥을 죄인 취급했지만, 욥은 아무리 뒤져봐도 집히는 잘못이 없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죄다 자신을 죄인으로 손가락질해도 하느님만은 자신의 무죄를 알고 계시며 언젠가는 자신의 의로움을 입증해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욥은 저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욥의 신앙고백에는 욥의 몸부림이 실려 있다. 조금만 머물러서 되새김해 보면, 이 짧은 신앙고백에 그의 현재와 미래가, 그의 삶 전체가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사도신경의 첫 대목이 꼭 이 욥의 신앙고백과 똑같은 풍으로 되어 있다.

 "크레도 인 데움(라: Credo in Deum)!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

 사도신경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주"(라: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oeli et terrae)이다. 우리말에서는 이것이 뭉뚱그려져서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로 번역되었다. 여기서는 '전능하신'이라는 수식어가 '천주'(^하느님)를 꾸미고 있는데, 이는 하느님이 전능하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런데 라틴어 원문의 신앙고백문은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 곧 전능하신 아버지, 천지의 창조주를"이라고 번역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즉 내가 믿는 분이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이러저러한 분이라고 그분 속성을 부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원문대로 번역을 해 보면, 문장 구조가 꼭 욥기의 신앙고백과 비슷해진다. "나는 믿나이다, …을"뿐만 아니라 고백하는 내용도 거의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신경은 "나는 신(의 존재)을 믿는다(라: Credo Deum)"라고 '머리'로만 믿는 믿음을 고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신경 고백에는 '믿는 이'와 '믿는 대상'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in"이 들어가 있다.

 "Credo in Deum."

 이는 욥이 자신의 운명 전체를 '변호인'이요 '후견인'인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였듯이 꼭 그렇게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에서 "나는 믿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나는 ○○○을 온전히 신뢰하고 의탁합니다. 내 희망을 ○○○에게 겁니다. 나는 ○○○에게 속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마음을 다하여 ○○○을 의지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욥의 신앙고백에 욥의 삶의 무게가 실렸듯이, "나는 믿나이다, 하느님을"이라고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도 우리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즉 내 삶의 온갖 물음, 회의, 실패, 절망 등에 대한 대답이요 대안이요 보루로서 하느님을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신경(使徒信經)이라는 말은 '사도로부터 내려온 신앙고백문'이라는 뜻이다. 사도신경은 이단과 사상적 오류의 위험들에 직면한 초기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정통신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산물로서 수세기 동안 형성 과정을 거쳐 생겨났다. 한 단어 한 단어 신중하게 확정해야 했다. 그래서 교부들은 오랜 논쟁(論爭)과 검증(檢證) 과정을 밟아야 했다. 6세기에 와서야 12사도 숫자와 일치하는 12개 항목으로 완성되기에 이르렀고, 또 오랜 시험기간을 거쳐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년)에 의해 비로소 서방 교회의 '공식 신경(信經)'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신앙고백문은 비밀리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곧 비전(秘傳)이었다. 초세기 수백년간 신앙고백문이 아무에게나 누설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종이에 '기록하는 것'을 엄하게 금하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깊은 뜻이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생명과 같은 신앙고백문이 아무렇게나 나돌아서 값싼 취급을 받거나 곡해되지 않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에 속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구전(口傳)으로 전수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중하고 귀한 말씀이 남용되거나 왜곡되지 않도록 미연에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된다.

 이런 사도신경을 오늘날 우리는 과연 제대로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는 미사나 묵주기도 때 사도신경을 외우면서 우리 삶과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건성으로 중얼거리지 않았나 싶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곧 "내가 믿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믿나이다"(Credo). 내가 믿는 것이다. 한 인간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이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즉 공동체에 전수된 그 교회의 신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신앙으로 받아들인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결국, 믿고 실행하는 행위의 주체는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것은 공동체가 대신해 줄 수 있지만 믿는 것은 철저히 '나'의 소관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내가 나의 실존을 걸고 믿는 것이다. 내 삶의 무게와 운명과 미래를 온통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나를 위한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자. 극심한 근심과 괴로움의 순간에도 바울로 사도의 고백 말씀을 붙들고 기도와 희망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

 하느님께서는 궂은 일 잦은 일, 희로애락 애경사, 모든 것을 합해서 당신에게 '좋은 결과'를 이뤄주시는 분이다. 숱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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