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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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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 9 -믿음 수업
name 운영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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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길'을 선택하라
 
 
의심들 때가 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실까?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절망, 응답 없는 기도 등은 신앙인마저도 회의에 빠뜨린다.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의 모순, 자신에게 닥친 삶의 부조리 앞에서 우리는 질문한다. "하느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계신다면, 왜 나는 그분을 느끼지 못할까?", "만일 하느님께서 지진해일 재해가 발생하도록 허락하셨다면 어떻게 그분을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왜 하느님은 십대 청소년들이 자살하려고 할 때 막지 않으실까?",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악한 사람들이 전쟁으로 세상을 파괴하려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걸까?" ….

 요즘 같아선 이런 항변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아마 없지 않을 것이다. "진정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신사(神祠)참배를 일삼는 일본이 경제부국이 되게 내버려 두시는가?", "하느님은 대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인사들을 벌하시지 않고 뭐하시는가?"

 하느님에 대한 의심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실존적(實存的) 의심과 진리 추구와 관련된 인식론적(認識論的) 의심으로 나뉜다.
 방금 예로 든 의심들은 실존적 의심에 속하는 것들이다. 여기에는 너무 고독해서 생기는 의심(lonely doubts)이나 위기에 처할 때 생기는 의심(crisis doubts) 등이 있다.

 - 사람은 너무 고독해서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 하느님을 의심한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하느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극심한 의심 없이 그런 기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람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태어난 존재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연히 하느님 사랑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게 되는 것이다.

 - 또 사람은 위기가 닥칠 때 하느님 존재를 의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될 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 버림받게 될 때, 학교에서 학기말 시험을 망치게 될 때, 승진에서 누락될 때, 하던 사업이 잘 안 될 때 우리 심신은 극도로 신경과민이 되어 하느님 존재를 의심하게 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인식론적 의심이란 교리나 세계관과 관련하여 이치를 따져볼 때 생기는 지적 의심(intellectual doubts)을 말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있겠다. "어느 하느님이 맞는가? 창조신인가, 범신인가?", "만일 하느님이 선하시다면 지옥이라는 것이 정말 있겠는가?",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힌두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요즈음 같아선 「다빈치 코드」를 읽고서 의심을 품는 이들도 제법 될 것이다. "이거 내가 지금까지 교회에서 배운 '예수'에 대한 교리들이 전부 거짓말 아냐?", "성경 그거 날조 아냐?"

 이래서 생기고 저래서 생기는 것이 의심이다. 믿음 생활에는 의심이 따라다니게 되어 있다. 그래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하느님을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그러나 확신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의심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의심은 우리를 더 큰 믿음에로 이끌어 준다. 의심은 언제나 믿음과 함께 존재한다. 완전한 확실함에 살고 있는 사람이 어디서 믿음의 필요성을 느끼겠는가?

 의심이 문제가 아니라, 적당히 하는 의심이 문제이다. 적당히 하는 의심은 우리를 후퇴시키거나 제자리걸음을 하게 한다. 「다빈치 코드」같은 엉터리 책을 읽고 그저 "~하더라"는 수준에서 책임지지 못할 물음을 던져 놓고 더 자세히 진실(眞實)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의심은 믿음을 해치게 된다. 일부러 의심에 머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체념하는 것도 현명치 못한 처사다.

 딜레마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4세기에 살았던 한 프랑스 수사(修士)가 들려주는 당나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당나귀가 두 개의 먹음직스러운 건초 더미 사이에 있었다. 정확히 두 건초 더미 중간에 서 있었다. 당나귀는 양쪽을 번갈아 보았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졌고, 결국 당나귀는 굶어 죽었다.

 하지만 진지한 회의(懷疑)는 궁극적으로 더 큰 이해와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한다. 또 더 가까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해 준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그 하느님은 진리여야 하고, 진리는 어떤 날카로운 의심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해답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진지한 의심은 믿음에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프랑스의 장 설리번 신부는 하느님께 대한 회의(懷疑)와 하느님에게서 도피(逃避) 자체가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 절대자에게서 도망치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조차, 그리고 어떤 물질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그 욕구를 부지불식간에 억누르고 있다고 믿을 때조차, 실상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그 절대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부정(否定)과 회의(懷疑) 자체가 믿음에로 나아가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처럼 보일 때가 있다. 모순이요 부조리로 보일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과 모리아 산에 올랐고, 욥은 뜨거운 태양 아래서 종기를 긁어야 했으며, 다윗은 동굴에 숨었고, 엘리야는 사막으로 힘없이 걸어 들어갔으며, 모세는 언제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느님께 여쭈었다.

이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는 무관심하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적대적이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위기 순간을 경험했다. 그들은 혼란스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기로에 서 있었다. 화를 내면서 돌아설 것인지, 아니면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때 그들은 모두 '신뢰의 길'을 택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신앙의 거인들로 기억하고 있다.

 셸던 배너켄은 말한다. "믿기로 결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 결정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나는 의심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 있게 말하지 못한다. 단, 의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구할 따름이다. '주님, 제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

 토마스 머튼이 우리를 격려한다. "우리가 얼마나 겸손한 복종과 사랑으로 하느님께 완전하게 자신을 드리는가에 비례해 그분을 알게 된다. 그분을 본 다음에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행동하라. 그러면 보인다. …
하느님을 믿기도 전에 그분을 분명하게 보려고 기다리는 자들이 믿음의 여정을 시작조차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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