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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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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이야기] 13- 전능하신 하느님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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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통해 드러내는 '사랑의 전능'
 
 
어느 30대초 신자에게서 상담요청이 들어왔다. 전화로 얘기해보라고 했더니 꼭 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고 한다. 서로 가능한 시간을 맞추어 약속을 잡아주었다. 그랬더니 질문요지를 미리 알려줄 터이니 만날 때 시원한 답변을 달라고 한다. 질문은 이랬다. "아무리 기도해 봐도 하느님 현존(現存)이 느껴지지가 않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아마도 이 신자는 무슨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 하느님께 기도한 듯하다. 그런데 하느님은 묵묵부답인 것처럼 느껴진 듯하다. 필자는 이 '하느님의 침묵'을 해명해 줄 과제를 하나 얻게 된 것이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묘방을 찾아주어야 하는 숙제를 하나 받게 된 셈이다.

우리는 실제로 하느님의 침묵 앞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때가 많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대답이 없는 하느님께 우리는 푸념하듯이 물음을 던진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이런 일들을 허락하시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면, 왜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시지 않는단 말인가?" 또 사회적으로 엄청난 불의와 부조리가 자행되는 것을 묵과하시는 하느님 처신에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묻는다. "하느님 전능하신 분 맞아?"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저런 끔직한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가?"

실제로, 근세기 들어 수많은 전쟁과 학살을 지켜 본 현대인들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과연 하느님을 전능(全能)하다고 할 수 있는가? 전능하신 하느님이 왜 아우슈비츠에서 600만 유다인이 학살되는 비극을 저지하지 않으셨는가? 왜 광주 5ㆍ18 민주화운동이 벌어지도록 묵인하셨으며, 왜 대구 지하철 참사를 막아주지 못하셨는가? 왜 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극악한 폭력에 대하여 침묵만 하시는가? 왜 저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도록 구경만 하신단 말인가? 왜 착한 사람들이 무고하게 고통당해야 하는가? 왜 전쟁과 고통이 있으며 질병과 죽음이 있는가? 왜 고통과 불의를 종식시키기 위해 그의 능력(能力)을 사용하시지 않는가? 하느님이 전능하시다면 악한 이는 왜 벌을 받지 않는가?

이 물음을 가장 뼈저리게 던진 이들이 바로 유다인이었다. 나치 시대를 살았던 한 유다인(동시에 그리스도인) 엘리 위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나치 친위대가 유다인 두명과 한 젊은이를 군인들이 보는 앞에서 목매달았다. 두 사람은 즉시 죽었다. 그러나 젊은이는 반시간을 죽음과 싸워야 했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한 사람이 '신이 어디 있어? 어디에 신이 있어?' 하고 물었다. 오랜 시간 후에도 젊은이가 여전히 올가미에서 괴로워하자 그 사람은 다시 '신은 지금 어디 있어?' 하고 외쳤다. 그러자 나는 내 속에서 한 목소리가 답변하는 것을 들었다. '신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하느님은 저기 저 올가미에 달려 있다.'"

유다인이 발견한 대답은 하느님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순간에 못 본 체하고 침묵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고통의 현장에서 고통받는 이와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그 고통을 해결해 주시지 않고, 오히려 인간과 함께 고통을 받으시는가? 이런 어리석음이 어디 있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이 외견상 무능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7-10 참조)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두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사람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실 때 이미 '사랑의 모험(冒險)'을 감행하셨다는 점이다. 자유의지를 주실 때 이미 인간의 '거절', '거부', '배반'을 각오하고 주셨다는 말이다. 사랑의 극치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배반하였다. 그 배반과 모반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무능하고 무력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는 한 하느님은 그러실 수밖에 없다. 다만 속앓이를 하시고 함께 아파하시며 고통을 감내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이상 그것을 박탈하지도, 간섭하지도 않으신다. 이것은 걸작(masterpiece) 인간을 만드신 하느님의 자존심이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인간을 하자 없이 완전한 존재로 만드셨다. 그래서 "보시니 참 좋다"(창세 1,31)고 하셨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를 존중하신다. 자유의지를 리콜(recall)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는 것이다.  

둘째,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속성상 '함께 아파하실 수밖에' 없으시다는 점이다. 연민(憐憫)을 표현하는 영어의 'compassion'이나 독일어의 'Mitleiden'도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께서 스스로 고통을 모르면서 인간 고통에 동참한다는 것은 오히려 하느님을 인간과는 무관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고통을 모르는 비정의 하느님, 무감각한 하느님을 우리는 인격신으로, 사랑의 하느님, 자비의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나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본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통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겪으셨던 고통 가운데 사랑하기에 고통에 동참(同參)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놀라운 구원 섭리가 드러났다. 이것은 사랑의 역설(逆說)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세상 권력을 쥐고 있어도, 자식 앞에 부모는 무력자이다. 결국, 자식이 하자는 대로 자식 말을 들어준다.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그 자식을 부모는 여전히 사랑한다. 당하고도 또 넘어간다.

하느님이 꼭 그렇다.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무능한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더없이 무능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매달리신 십자가에서 세상을 능가하는 하느님 '사랑의 전능'이 드러난 것이다. 즉 사랑하시기에 인간을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으신, 수모와 능욕조차도 능히 감당해 내시는 하느님의 '전능'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하느님의 불행이며, 인간의 울부짖는 소리는 하느님의 울부짖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왜 나를 이렇게…"라고 울부짖을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 요한 4,7-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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