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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21-원축복
name 운영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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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과 같이 영원히"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서인석 신부님이 쓰신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읽혔다. 이는 이 책이 당시 최대 현안이었던 인권(人權)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간명하면서도 감동적으로 집약한 명저(名著)였기 때문이었다. 이 책의 요지는 사람은 그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느님의 고귀한 피조물로서 불가침의 생존권을 생태적으로 지니고 있고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그들 생명의 파수꾼이요 보호자로 보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이 책은 오늘날 다시 읽혀야 할 책이다. 아니 다가오는 시대에도 계속 읽혀야 할 책이다. 우리가 이 책이 가리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존을 위협받는 모든 생명(生命)으로 알아듣는다면, 이 책은 오늘 우리에게 진정한 휴머니즘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 깊은 통찰로 안내해 줄 것이다.    

 성서에 그려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최고 걸작으로 창조돼 하느님의 원초적 축복을 받은 존재다. 영육의 통일체로서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지닌다. 독일의 신비 영성가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모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한 모상은 그 본체인 것으로부터 직접 존재를 부여받는다. 그것과 하나인 존재를 가지며 그것과 동일한 존재다."

 이처럼 창조주의 모상인 우리는 창조주와 존재(存在)를 공유한다. 곧 하느님의 특성을 나눠 받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몇가지를 열거할 수 있겠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불가침의 존엄성(尊嚴性)을 지녔다. 여기에는 일절 차별이 없다. 똑똑한 사람이나 바보스런 사람이나, 건장한 사람이나 불편한 사람이나, 남자나 여자나, 태어난 생명이나 태어나지 못한 생명이나 모두가 똑같은 존엄성을 지녔다. 모두 안에 하느님 모상이 있다. 그러기에 인종 차별, 낙태, 착취, 인권 유린 등은 바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죄악이라 말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약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option for the poor =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기저에는 바로 이런 사상이 깔려있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사람을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말아라.…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말아라.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출애 22, 20-22).

 둘째, 사람은 누구나 신성성(神聖性)을 지녔다. 누구나 거룩한 존재이고 거룩함에로 부름받은 존재이다. 그래서 종교가 있고 신앙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이 신성함을 깨뜨리고 동물처럼 사는 것은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을 파괴하는 행위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은 우리에게 명하신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셋째, 사람은 사랑과 나눔의 관계적(關係的) 성향을 지녔다. 사람은 너를 필요로 하고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사랑과 일치의 관계를 생명으로 하고 계신 하느님 모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줄곧 관계(=사랑, 일치)에로 부르신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요한 15,9).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11).

 이러한 신적 특성을 나누어받은 인간에게는 동물이 갖추지 못한 지정의(知情意)가 있다. 이는 인간을 다른 피조물의 관리자로 내세우기 위해 하느님께서 선사하신 특혜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당신 모상을 주셨기에 당신 모상인 사람에게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계시며, 이 모상을 믿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전권(창세 1,28 참조)을 사람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매일 창조를 마치시고 "보시니 좋았다"는 창세기 대목에서 우리는 원축복(原祝福)의 메시지를 읽는다. "좋았다"는 말씀은 단지 그래서 기쁘다는 감상이 아니고 앞으로 계속 그렇게 조화롭게, 본래 목적에 맞게 존재하라고 '축복'하셨음을 의미한다. 이 말씀으로써 "모쪼록 처음과 같이 영원히 존재하거라"하고 축복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발(發)하신 태초의 축복이다. 이는 세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피조물이 갖는 각각의 고유성(특징과 임무), 선성, 완전성을 보증하신다. 곧 생긴 그대로, 있는 그대로 선하고 완전하다고 선언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둘째, 세상의 악함, 인간의 타락은 하느님에게서 연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초의 창조에는 결함이 없기에 죄와 타락의 원인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남용한 데에 있다는 것이다.

 셋째, 현실적 좌절, 죄의 상황에서도 희망의 근거가 있다는 사실이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축복 의지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목적으로 창조하셨고, 역사를 절망, 어둠, 질곡에서도 마침내 당신이 뜻하신 목표를 향하여 이끄신다. 그 축복의 파장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에 스며 있고 또 스며 있을 것이다.

 이 축복의 절정에 인간이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4.10.12.18.21)는 말씀이 인간의 창조를 마친 후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는 최상급 찬탄으로 도약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인간 존재에 대한 하느님의 만족과 축복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렇다면 하느님 모상으로서 원축복을 받은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옳겠는가? 이를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 음악가 하이든이다. 그는 만년에 '미사곡'과 '천지창조', '사계' 등 교회 음악의 명작을 작곡했다. 이는 그가 평소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릴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느님! 당신이 제게 지혜를 주시어 제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 영광을 드러내는 작품이 돼야 합니다. 저는 제가 만든 음악을 주님 영광을 위해서 바칠 것입니다."

 그는 '천지창조'를 작곡해 발표한 날, 청중의 환호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입니다. 이 작품은 하늘에서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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