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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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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25-십자가 앞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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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 최고의 지혜와 힘
 
 예수의 십자가는 상식을 거스른 사건이었다. 그러기에 누구에게도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오로는 십자가의 역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을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1고린 1,23).

 그랬다. 기적을 구하던 유다인에게는 십자가가 예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역겨운 사건이었고, 이치를 따지는 이방인에게는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말재주'로 표현해낼 수 없는 오묘한 뜻을 지니고 있다(1고린 1,17).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일생에서 그가 누구였으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살았는가를 말해 주는 확증의 표지인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에 빠짐없이 연대해 살았던 사실을 드러내 준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 자리이다. 그 자리는 바로 하느님과 단절한 자리이며, 죽음의 자리이다. 예수는 바로 그 자리에까지 내려가셔서 인간의 삶과 연대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는 철저히 하느님과 단절을 체험했다.

 십자가는 어리석고 무력해 보이지만 최상의 지혜와 최강의 힘을 내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고린 1,25).

 한 인물을 기억할 때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하게 된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 말씀을 남기셨다. 이름하여 가상칠언(架上七言)이다(풀톤 J. 쉰, 「그리스도의 생애」 참조). 하나씩 간단히 짚어 보기로 하자.


 1)"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죽어가는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사형선고를 내린 재판관들을 비난하거나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완벽한 결백(潔白)이신 이분은 용서를 청하시지 않고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로서 용서의 기도를 바치셨다. 이로써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자신의 가르침을 최후 순간까지 몸소 사셨다. 아울러 모든 죄인들의 용서를 간구하셨다.


 2)"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

 죽어 가는 사람(=우도)이 죽어 가는 사람(=예수)에게 영생(永生)을 청한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왕국을 구한다. 죽음의 문턱에 선 도둑이 도둑처럼 죽으면서 천국을 훔치고자 한다. 이것이 그 도둑의 마지막 기도이자 첫 기도였을 것이다. 그는 단 한번 찾았고 단 한번 부탁했으며 감히 '모든 것'을 요구했다가 모든 것을 얻었다. 제자들마저 의심을 품고 있었을 때, 도둑이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인정했다. 그러나 하느님 외에 누가 용서할 수 있겠는가? 또한 영원히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 누가 천국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 예수는 이 말씀으로 이 세상 마지막 날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가려내게 될 최후의 임무를 앞당겨 실행하신 것이다.


 3)"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이 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6-27).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잃는 고통을 겪으며 우리 어머니가 되신다. 처음 천사의 수태고지에 피앗(Fiat: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이라 말하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 마리아는 이제 또 다른 절체절명의 고통의 순간에 피앗이 돼 그리스도인의 어머니가 되신다. 그때 예수는 다른 제자(요한)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다. 그것은 그에게 인류의 대표성을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곧 그 제자는 다름 아닌 '인류'를 대표해 '어머니'를 선물로 받았던 것이다.


 4)"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27,46).

 사실은 인간이 하느님을 거부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예수는 그렇게 철저하게 배척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 외침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서 느끼셨던 버림받음에 대한 절규였지만 절망의 절규는 아니었다. 절망하는 영혼은 결코 하느님께 부르짖지 않는다.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나 죄인들만의 몫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인간 가운데 가장 거룩하신 분도 느끼시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정신적 고통은 정신과 영혼과 마음에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 직접 그 같은 고독을 체험하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러한 공허함에 대해 결코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5)"목마르다"(요한 19,28).

 영혼의 고통에 대한 부르짖음에 이어 이번에는 육체의 고통을 표현하신다. 채찍질과 고문을 통해 이미 쇠진하신 몸으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흘리신다. 그러나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주시는 그분께서 "목마르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비극은, 어쩌면 신체적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었을지도 모를 주님의 이 말씀에, 사람들이 주님께 식초와 쓸개를 드렸다는 것이다.


 6)"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하느님은 역사를 통해 세번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하셨다. 첫번째는 '창조의 완성'에서, 두번째는 묵시록에서 '새 하늘 새 땅이 창조될 때'를 나타내면서 사용하셨다. 시작과 끝 날의 완성,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지금 이 말씀이 그 둘을 연결해 주고 있다. 치욕의 극치 속에서 모든 '예언'이 성취됐으며 인간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이뤄졌다고 주님은 탄성을 지르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죗값으로 당신 목숨을 바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이기에 십자가 죽음에서 당신 일이 완성됐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7)"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 23,46).

 죽음을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순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을 하게 된 '기쁨'을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주님의 죽음은 인간에게 봉사(奉事)하는 것이요, 아버지 뜻을 완수(完遂)하는 것이었다. 육화한 말씀은 지상 사명을 완수하셨기에 파견하신 천상 아버지께 다시 돌아가신다. 가장 완전한 기도, 당신의 목숨을 바치며 드리는 순간에 올리는 이 기도야말로 '가장 완전한 기도'일 것이다. 이제 예수는 고개를 떨구시고 기꺼이 돌아가셨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은 입에서 나온 말씀이 아니었다. 가슴에서, 심장에서, 저 영혼 깊은 곳에서 올라온 속내였다.

 십자가 앞에 서면, 예수가 왜 그리스도인지가 가슴에 저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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