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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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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26-랍비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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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가르침의 권위와 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지신 물음은 오늘 우리들을 향한 물음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이 물음에 대한 우리들의 실존적 대답은 다양하다. '실존적 대답'이라 함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대접해드리는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고백하였던 것과 같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살아간다. 즉, 예수를 구세주로 여기고 그를 믿으며("나를 믿어라": 요한 14,1) 그를 따르는("나를 따라라": 요한 21,19.22) 삶을 살아간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랍비'로 여기고 살아간다. 즉, 예수의 말씀을 의미 있는 삶을 위한 훌륭한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스승으로 존경하며 살아간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느냐 '랍비'로 공경하느냐의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심한 경우에는 '그리스도교인'이 되느냐 '비그리스도인'으로 남느냐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21세기 사람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보다는 랍비로 따르기를 더 원하는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이는 신흥영성운동(=뉴에이지)이 성행하는 까닭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확실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신흥영성운동에 빠진 채 몇년이 흐르면 어느새 그의 의식 안에서 예수는 더 이상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고 '랍비'로 둔갑해 버린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가 구세주로서 믿음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수행(修行)의 모범이요 목표로 전락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랍비가 아니라고 얘기할 수 있는가? 아니다. 예수는 탁월한 랍비였다. 그 위에 그리스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신앙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동시에 랍비로 공경하면서 그의 말씀(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랍비이기도 했다. 랍비는 가르치는 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 말씀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 광야에서 40일간의 단식 중에 다가온 사탄의 유혹을 말씀 몇마디로 물리치셨다.

 ─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 1,17)는 말씀 한 마디로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으로 하여금 그물과 배를 버리고 당신을 따르게 하셨다.

 ─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 구원의 도래를 선포하실 때도 사람들을 압도하셨다.

 ─ 악령 들린 사람으로부터 악령을 쫓아내실 때에도 말씀으로 해결하셨다.
 예수님 말씀은 듣는 이로 하여금 감히 거역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번 접한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태 7,28-29).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권위(權威)가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지 못했던 무언가 다른 힘과 품위가 있었다. 그 권위는 어디에서 온 것이었을까? 한마디로 그 권위는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오는 권위였다. 곧 예수님 말씀이 바로 '하느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권위가 있었기에 예수님 말씀에는 "골수를 쪼개는 힘"(히브 4,12 참조)이 있었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능이 있었다.

 예수님은 탁월한 랍비(Rabbi: 스승)였다. 예수님은 당대의 교사였을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에 걸출한 스승이었다. 이를 우리는 가르침의 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기 위해 일시적 방법(方法)을 쓰시지 않고 원리(原理)로 접근하셨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자신만의 고유한 교육 원리를 가지고 계셨다.

 첫째, 사랑의 원리였다. 예수님은 "하느님은 사랑 자체"(1요한 4,8)라고 가르치시고 동시에 몸소 그 사랑을 드러내셨고 아낌없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셨다. 그는 우선적으로 '작은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셨다(마태 9,10 참조).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에 대한 남다른 배려는 당시 사회적 배경을 고려할 때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마태 19,14 참조). 결국, 사랑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의 원리였다.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양심을 일깨워서 그들 삶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둘째, 가능성의 원리였다. 가능성의 원리란 피교육자를 과거 모습이나 현재 모습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 안목에서 앞으로 성장하게 될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믿어서 교육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은 결코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교육시키셨던 제자들은 대부분 계발되지 못한 사람들, 충동적 사람들, 죄인들, 당황한 사람들, 무지한 사람들, 편견에 빠져 있는 사람들, 불안정한 사람들이었다.

 셋째, 본보기의 원리였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가르쳤던 진리의 말씀에 대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본보기를 제시하셨다. 그 한 예로 예수님은 스스로가 '기도'(마태 11,25 외)와 '섬김'(요한 13,14 참조)의 모범이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에 동화(同化)함으로써 그들 삶이 변화함을 체험했다.

 넷째, 인격적 만남의 원리였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인격과 인격의 만남은 그 자체로 탁월한 가르침의 장이요 가르침 자체가 된다. 예수님은 두 인격 사이의 '만남'을 자신의 가르침을 위한 또 하나의 원리로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에 앞서 가르침을 받을 대상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가서' 만나셨다(마태 4,19; 요한 4,1-42 참조).

 다섯째, 깨달음의 원리였다. 깨달음이란 사람을 내면적으로 눈뜨게 하는 것으로서 비본래적 상태에서 본래적 상태, 혹은 그래서는 안 될 상태에서 그래야 할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고 진리 그 자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강요하거나, 지시하거나 혹은 주입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예수님은 내면적 양심을 깨우쳐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깨달아 변화하도록 인도했다.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고자 예수님은 질문과 비유와 시각물을 이용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접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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