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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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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28- 무엇을 가르치셨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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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잣대에 맞춰
 
 
지난 호에서 예수님을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 활동과 가르침은 그 양끝이 열려 있는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율법의 근본정신, 참된 행복의 길, 처세 원리 등을 소개했다. 이제 예수님 가르침의 궁극적 비전으로 들어가 보자.

예수님 가르침 알파와 오메가 역할을 하는 가르침이 '영원한 생명의 길'에 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 어린이 마음에 대한 언급 등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설파하신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첫째, 밭에 묻힌 보물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하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그 보물을 찾아낸 사람은 그것을 다시 묻어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마태 13,44).

이 말씀에는 두 가지 교훈이 담겨 있다.

먼저, 하느님 나라는 평범한 밭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일상에 은폐돼 있다는 것이다. 몰라서 그렇지 생활 속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 귀한 보물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사게 된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것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처럼 과감하게 투자하는 결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가치를 아는 만큼 투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돈이 되는 일이라면 있는 것 다 팔고 빚을 내서라도 투자한다. 세상 가치를 위해서 이럴 수 있다면 천상 가치를 위해서는 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요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로 설명하신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에 비길 수 있다.…겨자씨는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마태 13,31-32).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온통 부풀어올랐다. 하늘 나라는 이런 누룩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33).

가장 작은 일, 아주 미소한 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확장되고 완성된다는 말씀이다. 하느님 나라는 천지개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작은 실천을 통해 번져 나가고 다가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 예수님은 '잃었던 아들'의 비유(루가 15,11-32)를 통해서 목을 내놓고 기다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애절한 심정을 전하신다. 하느님은 여러 자녀가 있어도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멀리 있을 때 이미 아들을 알아보지만 아들은 그렇지 못하다. 자비(慈悲)의 눈은 회심(回心)의 눈보다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아버지께서는 애타게 기다리신다. 그러니 아버지께 돌아가자. 다시 그분 품으로 귀의하자. 아버지 품, 곧 하느님 나라가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다. 돌아가면 호통을 치실 것 같지만 사실은 송아지를 잡아주신다. 그러니 마음을 고쳐먹고 돌아가자.' 이 점을 예수님은 강조하셨던 것이다.

동심을 회복하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르 10,15).

예수님 말씀을 이리 재보고 저리 재보고 세상 저울로 저울질해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계산하고 약은 체해서도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사람은 결국 제 꾀에 넘어간다. 자가당착에 빠진다.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이 명료하게 가르치시고 명하셨어도 그것을 제자들이 다 알아들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열두 사도는 객관적으로 교육 수준에서 봤을 때 예수님 가르침을 수용할 만한 지적 능력이나 지혜가 부족했을 듯싶다.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아직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느냐?"라고 하신 말씀이 17번이나 나온다. 쉽게 말해서 "아직도 모르느냐?"는 핀잔을 이토록 여러 번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올바로 알아들을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진실로 요구한 것은 당신 말씀을 알아듣는 '지성'이 아니라, 낡은 비전을 버리고 '새로운 비전'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지성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아무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던 것은 낡은 비전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사도들은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그 무엇을 나름대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물질적 풍요, 즉 고기가 가득 찬 배, 여러 척의 배, 배부름과 부유함을 꿈꾸었을 터이다. 그런데 어느날 그들 삶 한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 그들의 세속적 욕망을 깨뜨리고 그들의 자기중심적이던 꿈을 부수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리고 전혀 새로운 삶의 목표를 제시하셨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 그러나 실로 이루어지기 힘들었던 것은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는 지성이 아니라 바로 삶의 태도를 바꾸는 회개였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바꾸어 말하면 이는 다름 아닌 다음과 같은 물음인 셈이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느냐? 너의 무엇이 낡은 비전을 버리고 새 비전을 취하지 못하게 한단 말이냐?"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물으신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자신들의 관점에서 들었다. 이전의 습관, 타성, 아집을 버리지 않은 채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니 이해도 안 되고 수용도 안 됐다. 자신의 잣대를 버리지 못하니 예수님 잣대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 잣대에 우리를 맞춰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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