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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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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31-성령과 구원경륜
name 운영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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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둘러싼 모든 것, 성령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성령'은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서 뿔뿔이 도망친 겁쟁이 제자들을 당당한 '선포자'로 변화시켰다(사도 2,1-11 참조). 이 '성령'이 죽음이 두려워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다락방에 숨어 있던 제자들을 '증거자'로 변화시켜 마침내 하나같이 그리스도를 뒤따라 대담하게 '순교'하게 했다.

 한마디로 성령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이 이어서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바로 이 성령으로 인해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송두리째 바뀌어 예수님이 행한 일을 이어서 행할 수 있게 됐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베드로와 바오로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다. 성령의 능력이 절름발이를 낫게 했고(사도 3,1-10; 14,8-10 참조), 죽은 이를 살려냈고(사도 9,36-41; 20,7-12 참조), 악령을 몰아냈고(사도 16,16-18 참조), 열정적으로 설교하게 했다(사도 2,14-36; 17,22-31 참조).

 이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워진 그들은 힘차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사도 2,38 참조), 사람들이 하느님 성령을 받도록 이끌어주기도 했다(사도 8,15 참조).

 성령께서 이루신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성령으로 인해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영)'이 될 수 있었다(사도 4,32 참조). 성령은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렸다. 소유와 인종과 성별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의미를 잃게 됐다(갈라 3,28 참조).

 이렇게 성령이 만민(萬民) 위에 내려옴으로써 지난날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사 64,7)에 지나지 않았던 하느님은 마침내 '만민의 아버지'(에페 4,6)가 되셨다.

 그렇다면 성령은 삼위일체 하느님 가운데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실까? 이 물음은 우리 신앙생활과 동떨어진 물음이 아니다. 하지만 지난 2000년간 삼위일체 논의는 사변적(思辨的)으로만 흘러왔다. 곧 "성령은 어떤 분이고 성령과 성부, 성령과 성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골몰했다. 이를 소위 내재적(內在的) 삼위일체론이라 한다.

 그런데 이 내재적 삼위일체를 설명하려면 의당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게 돼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는 '사랑' 이외의 것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 한번 보자. 누구든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성경 말씀을 즐겨 인용한다. 사랑이란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에게 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이 가능하려면 하느님 안에 최소한 두 인격이 공존해야 한다. 홀로는 그 누구도 사랑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이 삼위일체가 아니셨다면 세상이 창조되기 전까지 하느님은 사랑이셨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귀납적으로 접근할 때 사랑의 속성상 하느님은 삼위일체임이 입증되는 것이다.

 그분들 사이의 문제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좀 이기적이고 실용적으로 물을 필요가 있다. "대관절 이 삼위일체가 나의 삶,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인가?"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 이 물음에 우리는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 성부는 '우리 앞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성부 하느님은 근원이시고 목표, 시작이요 마침이시다. 생명을 주시고, 생명의 근거 되시고, 생명의 마감을 정하시는 분이시다.

 ─ 성자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성자는 임마누엘(이사 7,14 참조), 곧 우리와 함께하신 하느님이시다. 죄인의 대변자, 억압받고 소외받는 자의 변호인, 찾는 이와 묻는 이의 스승(요한 14,26 참조), 고통받고 절망한 자의 목소리(루가 12,12 참조)시다.

 ─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 안에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는 분이시다. 새로움, 평화, 쇄신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성령을 파라클리토(paraclitus)라 불렀다. "내가 아버지께 청해 너희에게 보낼 협조자(파라클리토)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이는 우리에게서 성령께 대해 신뢰의 마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훌륭한 '카피'였던 셈이다. 파라클리토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어로 파라클리토는 마치 대변인이나 변호사처럼 '곁에 서 계신 분'이라는 뜻이다. 심한 박해를 받았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런 의미는 큰 위안을 줬을 것이다.

 둘째, 파라클리토는 큰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병사들을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지닌다. 두려움에 떠는 병사들을 위해 파라클리토는 큰 소리로 확신을 심어 주고 사기를 진작시킨다.

 셋째, 파라클리토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할 '깊은 한숨', 곧 탄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며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신음)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이러한 파라클리토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신다. 그분은 내 편이시며 내게 힘을 주신다. 성령을 등에 업으면 '나'는 '나' 자신이 미덥고 자유롭다. 파라클리토 성령은 내 맘 속에서 진리를 드러내시며 '나'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모든 것을 덮은 막을 벗기신다. 성령께서 막을 걷어낼 때 우리는 온전한 진리를 깨닫는다. 통찰력이 생기고 근원을 볼 줄 안다.

 현대인 영성에 유익한 양식을 대주고 있는 안셀름 그륀은 성령을 이렇게 말한다.

 "성령은 우리의 동반자요 위로자며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또한 생명의 샘이요 불이며, 빛이요 사랑이며 또한 기름 바름입니다. 성령은 생명의 샘입니다. 이 샘은 하늘스런 것이므로 퍼내도 퍼내도 고갈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덥히는 불이며 밝히는 빛입니다. 성령은 기름 바름입니다. 우리 상처를 치유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를 짊어지게 합니다."

 곧 우리는 우리를 동반하시면서 치유해 주시는 분인 성령께 의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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