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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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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33-별난 카리스마, 은사
name 운영자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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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도 상처도 성령의 은사
 
 "나같이 쓸모없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어?" "나같이 실패만 한 인생이 교회에 무슨 도움이 되겠어?"하며 회의만 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미담이 있다.

 2004년도 사제피정을 부산교구 허성(야고보) 신부님 지도로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신부님께서는 피정강의 내내 당신의 실패담만 들려주셨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도 무덤덤한 마음을 녹여놓았다. 피정을 마치고 나는 "실패한 것도 은사가 될 수 있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신부님 이야기를 신자들이 들으면 크게 은혜가 될 것 같아서 월간 「참 소중한 당신」에 인터뷰할 것을 귀띔해 주었다. 잡지에 실린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수도회에서 쫓겨나고, 선교사로 떠돌다가 천신만고 끝에 41살에 신부가 된 그. 대충 그런 이력만 엿들어도 그 길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수원의 한 가난한 농촌 마을에서 태어난 허 신부는 신자 방문을 나온 주임신부 권유로 16살 때 소신학교에 입학하며 사제 꿈을 키우게 된다.

 그러다가 그는 성탄방학 때 본당 청소년들에게 잘해 준 일이 꼬여서 각 동네의 시샘을 일으키는 바람에 신학교 4학년을 마칠 무렵 본당 분열의 누명을 쓰고 제적당한다. 그러나 거기서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평소 수도 사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수도회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평수사로 서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7년간 수도생활을 타의에 의해 그만두게 된다. 또 한번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된 것이다. 수도회에조차 발붙일 수 없게 된 허 신부는 당시 부산교구장이었던 최재선 주교로부터 선교사로 일해 줄 것을 초대받는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이 '오소'라는 마을. "막상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했다는 곳에 가 보니 신자가 한명도 없는 거예요. 전쟁 직후라 교회가 밀가루며 면실유, 분유 같은 것들을 나눠 줄 때였으니 돈이 많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니 선교사가 묵을 방 한칸 마련해 놓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생활하기를 7년.

 그렇게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며 15년 세월이 지나갔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최 주교를 찾아갔다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된다. "혹시 신부 될 생각 없어?" "신부 될 생각이 있으면 될 수 있는 건가요?" 허 신부의 열심한 삶을 지켜봐 왔던 최 주교가 사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허 신부는 청강생으로 광주가톨릭대학교에 들어가게 됐고, 1974년 7월5일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사제로 서품된다. 그는 그 은혜로운 첫 미사 강론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제가 어떻게 사제가 됐는지 설명하라면 못합니다. 사제가 되고 싶어 신학교에 갔지만 제적당했고, 평수사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평신도 선교사로 열심히 살려고 했지만 일주일에 다섯번 쫓겨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하느님께 늘 섭섭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나서 어머니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드냐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하니 하느님께서 저를 버렸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버리지 않으셨고, 원망만 했던 그 순간에도 하느님은 저를 사랑하셨고, 버림받았던 때에도 사랑으로 보호하고 인도해 주고 계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제 손을 놓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삶은 "하느님, 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하고 절규했던 눈물의 예언자 예레미야를 꼭 닮았다. 사제품을 받은 이후 그는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목자가 됐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위로를 받는다. 어떤 힘든 일도, 갈등도 그와 이야기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처지가 너무나 감사하다고 느끼게 된다. "고통 받고 있을 때는 더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잖아요? 제 고통도 그런 쓰임을 하도록 하느님께서 훈련시키신 셈이죠."

 상처도 은사가 될 수 있다. 서울대교구 알코올 사목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허근(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그 좋은 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개인 삶은 물론 사제 생활의 위기에까지 이르렀던 허 신부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한 후,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사목에 헌신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1980년 사제품을 받고 돈암동보좌를 거쳐 김수환 추기경 비서로 지냈던 허 신부가 알코올에 빠지게 된 것은 1982년 해병대 군종신부로 배치되면서부터였다. 술이라고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한두잔 마시던 게 전부였던 그에게 해병대의 고된 훈련과 체력에 자신 있던 젊은 기운은 주량을 늘리는 계기가 됐다. 삭막한 군 생활 중 술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됐으며 3년 동안 군복무를 마칠 무렵엔 이미 음주 습관이 굳어져 있었다.

 이후 본당사목을 하면서도 신자들과 술자리에 어울리는 횟수가 늘어만 갔다. '술 좋아하고 화통한 신부'가 왔다며 좋아하던 신자들도 점차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술이 과해질수록 신자들과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사제 생활마저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허 신부는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자들이 그렇듯 수치심과 자괴감을 잊기 위해 다시 술을 마시는 악순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몸과 영혼까지 황폐해져 가던 허 신부에게 희망의 불을 지핀 것은 평소 그를 아꼈던 김옥균 주교의 격려와 아들의 단주를 위해 날마다 눈물로 기도했던 어머니 사랑이었다. 결국 그를 움직여 광주에 있는 알코올 중독 치료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중독에서 풀려날 무렵 그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

 "지나간 일은 생각하지 말아라. 흘러간 일에 마음을 묶어 두지 말아라. 보아라,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이사 43,18-19).

 그는 남은 일생을 알코올 중독자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다.

 "그래, 내 경험으로 알코올 중독자들을 더 잘 도울 수 있을 거야. 내가 앞으로 사제로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있어"라는 말을 되뇌며 그는 서울로 올라왔고, 1999년 '가톨릭 알코올 사목 센터'가 문을 열게 되면서 제2의 사제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이제 두분 신부님께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성령의 은사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위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하느님 위로를 받는 우리는 온갖 환난을 당하는 다른 사람들을 또한 위로해줄 수가 있습니다"(2고린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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