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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34- 교회의 미래, 평신도 은사 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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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 사용해야 보배
 
한 분야에 조예가 깊어지면 그 분야에 대해서 미래예측이 가능해진다. 필자는 독일 신학자 메츠(J.B. Metz)의 말에서 미래 교회를 위한 예언(預言)을 발견한다. 그는 1980~90년대 교회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류를 진지하게 관측한 결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시대'는… 이제 더 이상 위대한 예언자들의 시대도 아니요, 위대한 성인들의 시대도 아니요, 탁월한 신학자의 시대는 더욱 아니다. 교회의 시대는 바야흐로 작은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점차 주역의 자리를 차지하는 시대, 곧 작은 예언자들의 시대요, 작고 이름 없는 성인들의 시대이며, 이런 의미에서 바닥의 시대인 것이다."

 그는 21세기를 염두에 두고 이 선언을 했다. 그 말대로 지난날 각 시대 위기와 도전 속에서 교회를 이끌어온 주역들은 예언자요 성인이요 신학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위대한 예언자', '위대한 성인', '탁월한 신학자'들만 가지고는 안 되는 시대가 됐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도전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딱히 몇 가지로 정체를 파악하기가 어렵기에 그렇다. 도전은 사방팔방에서 '양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침투해 오고 있기에 스스로가 자신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둘째, 시대 흐름은 점점 직접 참여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소시민 연대의 시대, 참여의 시대다. 이 시대 지도력은 위대한 한 사람에게 편중되지 않고, 시민들에게 공유된다. 이런 추세는 교회생활에서도 요청되고 감지된다. 초대 교회 정신에 부합하는 이런 경향을 굳이 막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요컨대, 이 시대는 '위대한 지도자'의 시대가 아닌 '작은 이들의 시대', '작고 이름 없는' 평신도들의 시대이다. 미래 교회 운명은 평신도들의 주도적 활동에 따라서 판가름날 것이다. 즉 미래 교회는 평신도들이 자신들의 은사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성쇠가 결정될 것이다.

 이제 평신도는 단순히 사목 대상이 아니라 교회 활동 주체다. 다행히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평신도의 은사와 직분을 인정하는 선언을 했고, 그에 입각한 사제직, 왕직, 예언직 수행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남은 과제는 이런 비전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의 은사는 누구에게나 있다. 성령께서는 믿는 이들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 주십니다"(1고린 12,7-11).

 이 '은총의 선물' 곧 은사(恩賜)는 그에 걸맞는 사명(mission)과 역량(competence)을 동시에 불어넣어 준다. 성령의 은사는 사명으로 불타는 열정(passion)과 능력으로 충만한 권능(power)을 신자들에게 부어주는 것이다.  

 사목자 책임 가운데 중요한 것이 신자들이 지닌 이 은사를 스스로 발견하고 사용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각자가 지닌 은사를 어떻게 발굴할 수 있을까? 이제 실제적 얘기를 해 보자. 은사는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첫째, 재밌어 하는 것이 은사다. 가지고 있는 재능을 꼽아보라고 하면 뒷걸음질치는 이들도 '재밌어 하는 것'을 말하라고 하면 곧잘 말한다. 바로 그것이 그에게는 하늘이 준 은사이다. 노래, 요리, 운동, 기계, 수학, 그 밖에 무엇을 재밌어 하든지 그것은 대부분 그 분야에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재밌어 하는 것을 계발하면 그것이 은사가 되는 것이다.

 둘째, 고유한 성품이 은사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성격의 사람들이 있다. 12사도가 각각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알고 나면 그들이 왜 서로 갈등했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사목활동에 있어서 좋고 나쁜 성격이란 있을 수 없다. 교회의 아름다운 조화를 위해서도 각기 다른 성격이 필요하다. 우리의 서로 다른 성격은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많은 색깔과 무늬로 하느님 빛을 반영한다. 불뚝 성질이 있는 사람은 '정의구현'에서 은사를 발휘할 수 있고, 온유한 성품의 사람은 '상담'에서 은사를 발휘할 수 있다.  

 셋째, 경험이 은사다. 가족 경험, 교육 경험, 직업 경험, 영적 경험들, 교회 활동, 고통 등을 잘 갈무리해 두면 그것이 은사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상처의 경험도 은사가 될 수 있다. 다운증후군 아이를 둔 부모가 그 부모를 대상으로 사역할 때, 알코올 중독 경험을 가진 자가 현재 중독증에 처해 있는 이들을 위해 사역할 때, 그보다 더 잘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또 남편이 바람을 피워 집을 나갔을 때, 그와 같은 일을 경험한 이들보다 더 잘 위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소중한 '은총의 선물' 곧 은사도 발휘하지 않으면 녹이 슬고 곰팡이가 낀다. 요는 그 은사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성령의 불을 끄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1데살 5,19-20).

 성령은 사용할수록 많아지고, 봉사를 위해 내어놓을수록 불어난다. 성령은 감춰둘수록 줄어들고, 나만을 위해 움켜쥘수록 사그라진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

 이 말씀을 우리는 은사 발휘를 게을리한 개인을 향한 경고인 동시에 교회를 향한 경종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잘하는 사목은 특출난 능력으로 신자들을 훌륭하게 돌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정말로 잘하는 사목은 '전 신자'가 각자 은사를 발휘하도록 깨우치고 돕고 기회를 주는 사목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는 그냥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통해 얻는다는 사실이다. 기도는 신자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해준다. 특히 의무적으로 바치는 기도가 아닌 자발적으로, 그리고 성령 강림을 바라는 기대로 바치는 기도는 더욱 그렇다. 초기 교회 사도들은 갖은 박해에도 복음을 담대히 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성령의 능력을 합심해 간구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의 기도를 100% 들어주셨다.

 "그들이 기도를 다 마치자 모여 있던 곳이 흔들리고 사람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서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되었다"(사도 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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