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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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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차동엽 신부의 가톨릭 이야기] 43- 십계명과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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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계명, '가슴'에 새겨라
 
 
 십계명 각각에 숨어 있는 보물들이 있다. 이 보물들을 잃지 않고 그대로 누릴 줄 안다면 십계명은 그야말로 만사형통의 길임에 틀림이 없다.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법을 한눈팔지 말고 성심껏 지켜라. 그리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리라"(여호 1,7).

그런데 이렇게 좋은 것이 십계명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십계명의 복음(福音)을 잃어버린 채 십계명에서 무거운 짐만 보게 됐다. 그나마 그 짐을 스스로 짊어진 것이 아니라, 남의 어깨에 메주기 일쑤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략)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2-4).

 왜 이 지경이 됐을까? 십계명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는 길잡이로 본 것이 아니라, 십계명을 남을 심판하는 '잣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설령 십계명의 가치를 놓치지 않고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그대로 산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마 7,21-24).

 즉 율법을 반기는 이성(理性)의 법에 대항하는 다른 법, 그 법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법은 바로 육체의 법이다. 이 육체의 법은 바로 원죄(原罪)로 인해 초래된 법이다. 원죄로 아담과 이브는 그들이 향유했던 초성은혜(超性恩惠)를 잃어버리고 육체의 법에 예속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문제였다. 십계명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십계명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 아래 짓눌리는 운명에 있었던 것이 구약의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로마 3,19).

 이렇듯이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사람의 마음(=양심)이 따로 놀았다. 그 해결책은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이었다. 이를 우리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에서 발견한다. 일찍이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다.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이집트에서 데려내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들어라. 그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예레 31,31-33).

 여기서 말하는 "이집트에서 데려내오던 때에 맺은" 옛 계약의 핵심 내용이 바로 십계명이다. 그런데 앞으로 맺을 새 계약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그것은 새로운 내용의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 '법'을 새겨줄 것이라는 말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십계명 자체를 뜻한다. 그러니까 '새 계약'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옛 계약'에서는 돌판에 새겨 외적으로 제시했던 십계명을 이제는 아예 '마음'에 새겨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이 무엇을 뜻하는지 성령 강림을 체험하고 나서야 알아들었다. 성령을 받고 나니 단지 십계명을 지키는 데, 전전긍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기고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에 법을 새겨 준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성령 안에는 십계명의 은총을 아는 진리가 함께 있고 또 그것을 누리는 능력이 함께 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이를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새 법은 두려움 때문에 행동하기보다는 오히려 성령께서 불어넣어 주시는 사랑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사랑의 법이라고 부른다. 또한 신앙과 성사들로써 행동하도록 은총의 힘을 주기 때문에 은총의 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새 법은 또한 자유의 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새 법이 의식적(儀式的)이고 법률 지상주의적 율법 준수를 요구하던 옛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사랑의 자극을 받아 기꺼이 행동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마침내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종'의 신분에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 주시어'(요한 15,15) 그리스도의 벗이라는 신분으로, 나아가 상속을 받을 아들의 신분으로 우리를 드높여 주기 때문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1972항).

 이를 체험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갈라 5,18).

 그런데 누가 성령을 받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다. 결국 믿음을 통해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십계명 은총을 온전히 누릴 때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누리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누구도 십계명 가운데 단 하나라도 어기게 되면 정의를 성취할 수 없다.

 누구도 십계명 가운데 단 하나라도 소홀히 여기면서 평화를 누릴 수 없다.

 누구도 십계명 "일 점 일 획"(마태 5,18)에 충실하여 정의와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는 온전히 기쁨을 누릴 수 없다.

 그리고 누구도 자신 안에 성령이 활동하는 한 이 정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특권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결국 성령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에 따라 십계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십계명은 그들 밖 '돌판'에 새겨져 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에게 십계명은 이미 그들 안 '마음'(=가슴)에 새겨져 십계명과 양심이 서로 조화롭게 순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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